내게 가장 특별했던 280일 (4)
내게 가장 특별했던 280일 (1)
덜컥 감기에 걸려버렸다. 임신 초기부터 지금까지 크게 아픈 데 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왔는데! 땡쓰 기빙 연휴에 하필 감기라니. 안정을 취하면서 기말고사 공부를 쉬엄쉬엄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따끔따끔한 목이 자꾸 신경 쓰인다. 약간 성가신 정도였는데 점점 아프다. 이러다간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쓰러져 누워있어야만 할 것 같아 속상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임신부는 감기약에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지 않던가. 나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나을 때까지 마냥 기다려보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서는 이거 족히 열흘은 갈 텐데. 큰일이다.
감기가 찾아오는 이유는 늘 억울한 데 있었다. 방송을 한창 하던 시절엔 감기에 걸리면 일에 너무 큰 지장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특히나 더 조심하려 애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소하고 별거 아닌 이유로 감기 앓이를 하곤 했다. 선풍기를 틀어둔 채로 살짝 잠이 들었던 여름밤, 창문이 살짝 열린 걸 모르고 잠을 청했던 겨울밤. 찰나의 실수로 새벽녘 목이나 코 뒷부분이 시큰시큰할 때면 이거 한 일주일은 가겠다 싶어서 약을 꽤 독하게 (?) 지어먹었다. 감기약을 세게 처방해주기로 소문난 동네 병원에 가서 느낌적인 느낌으로 '쎈 약'을 먹고 이틀, 사흘 시들시들 힘들어하고 나면 그나마 업무에 지장은 없는 정도로 회복되었다. 작은 실수가 불러낸 큰 앓이. 그런엔 이번엔 도대체 왜 그런 거지.
땡쓰 기빙 연휴 첫날, 비 내리는 아울렛에서 돌아다녔던 게 전초가 됐을까. 비는 좀 맞았지만 그래도 날씨가 춥지 않아서 꽤 따뜻하게 다녔다고 생각했다. 요 며칠 학교 오가면서 너무 찬 공기를 많이 쐬었던 걸까. 그게 누적되었다가 이제야 면역력이 바닥이 났나. 어젯밤 나도 모르게 이불을 살짝 걷어차고 잤던 것도 유력한 원인 중 하나였겠다. 추워진 날씨 탓에 요즘 이불에 파묻혀 자는 게 일상이었는데 하필 어젠 휙 걷어차고 자고 있었을까.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난 결국 감기에 걸린 임산부가 되어버렸다.
'임신' + '감기' + '낫기'
포털 사이트에 세 키워드를 입력해보았다. 임신 일상 이후 감기 앓이로 고생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군. 이렇게나 많은 선배맘들이 감기 후기를 올려둔 걸 보면 말이다. 가장 눈에 띈 건 '배숙'에 관한 이야기였다. 꼭 임산부가 아니더라도 목감기에 걸리면 배숙을 만들어 먹는 게 좋다고 누누이 들어온 바 있었으나 한 번도 내 손으로 해 먹어 본 적은 없어서 효과가 어느 정도나 즉각적인지는 짐작 불가. 그래도그 어떤 약에도 기댈 수 없는 나에겐 그나마 가장 '특효약'일 것처럼만 느껴졌다. 마침 냉장고에 배도 하나 남아있는데 왠지 '운명이다' 싶었다. 우리 집 요리왕 남편에게 배숙 레시피가 담긴 링크를 메시지로 툭 보냈다.
(뭐 꼭 해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이런 것도 있다네, 여보?
툭 던진 메시지 하나가 남편을 바삐 움직이게 만들었다. 엊그제 한인마트에 한 번 다녀온 남편은 가까운 곳에 있는 또다른 한인마트에 또 한번 다녀왔다는 얘기. 대추와 토종꿀을 사러 헤맸다. 땡스기빙 연휴 주간이라서 당일엔 마트를 열지 않은 곳이 많았는데 나 때문에 기어코 고생한 남편. (여기서나마 미안하다고 속삭여본다.) 배숙은 처음 만들어 본다던 남편은 자꾸 배숙을 '백숙'이라고 발음해서 자꾸만 웃음이 새게 만들었다.
백숙은 닭이고
배숙은 배라고!
발음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황톳빛 배의 뚜껑이 열렸고, 그 안의 하얀 속살이 사르르 부서져 나오기 시작했다. 중탕을 위해 냄비 속에 안정감을 품고 '탁' 착지한 예비 '배숙'. 이제 푹 익어가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
이야. 건강해질 것 같은 느낌이야
내 평생 처음 맛보는 배숙. 이거 먹으면 진짜 감기 낫는 거야? 세상 어디에 감기 바로 똑 떨어지는 비책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많은 예비맘 선배들이 경험했다고 하니! 나 역시 미약하게나마 그 특효를 누렸으면 좋겠다고 바라보았다. 뜨끈뜨끈하게 중탕한 배에서 저절로 즙이 우러난 맛, 너무 달지 않고 진하지 않아서 몸에 더 착 감기는 느낌이 신기했다. 독하게 약을 지어먹어야만 내 몸 속의 바이러스를 휘휘 떨쳐낼 수 있는 거라고 믿어왔던 내겐 실로 기묘한 경험이었음을! 있는 힘껏 '세게' 농도를 높여 몸 속 악한 성분을 다 퇴치하려 노력해야 효과가 있는 건 줄 알았는데 편견이었다. 은은하게 우러난 뱃물이 차분히 몸 곳곳에 스미는 느낌, 바이러스에 예민해진 그제야 차분히 정돈되는 것 같았다.
미국 와서 먹었던 것 중에
최고 맛있어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남편의 배숙에 뒤이어 짠 하고 나타났던 건 남편의 또 다른 특식, 갈비찜! 땡쓰 기빙 데이에는 터키를 먹는다지만 우리 부부는 우리식대로 '갈비찜'을 픽했다. 겸사겸사 감기로 약해진 체력을 보충하는 데도 딱인 음식이 아니던가! 배는 고픈데 딱히 입맛이 없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몸만 배배 꼬꼬 있던 나는 비로소 환호성을 질렀다. 내 남편은 요리 천재였던가? 내 남편은 우리 엄마가 보낸 또 한 명의 엄마 아바타인가? 이건 정말이지, 엄마의 손맛이다. 언제 입맛을 잃었었냐는 듯, 싹싹 긁어먹고 있는 내 먹방을 상상해 보라.
여기 갈비찜
고기만 좀 더 추가요!
배숙과 갈비찜의 환상 콜라보레이션. 남편의 정성과 사랑이 적극 피처링해 준 덕분이었을까. 연휴 마지막 날 아침, 눈을 뜨는데 어라? 생각만큼 목이 따갑지 않았다. 순간의 착각인가? 몇 번을 거듭해서 침을 삼켜보는데 정말 '목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팠던' 며칠 전의 느낌은 사라지고야 말았다! 감기에 워낙 예민한 직업을 10년 가져왔던 터라, 감기가 나아가는 느낌 잘 구별할 줄 안다. 비로소 '나아간다'는 징조가 내 몸에 열렬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감기약에 손을 못 대니 ‘한참을 고생하겠구나’ 체념했던 내겐 기적과도 다름없었다.
별 이유 없이 여기까지 잘 왔다고 생각했던 찰나에 덜컥 마주한 '임산부 감기'. 독한 약에 기대지 않더라도 몸을 다스릴 수 있는 기특한 방법은 이렇게나 숨 쉬고 있었다. 잘 먹은 덕분이다. 임산부에게 좋다는 이런저런 보양식을, 그리고 남편이 고이 들여낸 시간과 정성의 힘까지도 잘 소화시켜낸 덕분. 혹시나 또 한 번 아프더라도 충분히 잘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으니, 뭐 겁날 게 없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또 감기 걸려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나 챙겨주다가 내 남편이 몸져누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