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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Mar 09. 2020

'임신'했다는 증명서

내게 가장 특별했던 280일 (5)

내게 가장 특별했던 280일 (1)

별 것 아닌데 때론 '별 것'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다. 각종 증명서 꾸러미들. 미국 대학원에 지원하면서도 상당히 많은 증명서가 필요했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버린 학부시절의 성적증명서부터 학부 졸업증명서, 미국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을 만한 영어 능력을 어느 정도 증빙한다고 믿어지는 토플시험 성적증명서, 여기에다 등록금을 낼 여력이 된다고 또렷하게 외쳐야 하는 재정 증빙서류들까지, 그때 그때 챙겨서 내야 할 증명서가 참 많기도 많았다. 사본으로는 대체가 안돼서 낼 때마다 추가금을 들여 원본 서류를 새로 발급받아야 했으니, 증명서라는 녀석, 참 애지중지 참 고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었다.


부부 출산교실에서 받았던 수료증명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뭔가 완성되었다는 '뿌듯함'을 촉발시키던 든든한 종이


미국 산부인과 OB/GYN 방문도 벌써 일곱 번째였다 (2019년 12월 첫째 주의 이야기). 열흘간 이어진 감기 앓이로 몸 컨디션이 전반적으로 바닥을 치고 있던 상황, 금요일 오후 늦게 담당의를 만났다. 한국계 의사와의 두 번째 만남. (상상하시는 바와 달리 대화는 99.9%는 영어로 이뤄진다.) 담당의와 만남이 있는 날엔 초음파를 따로 보지 않고 전반적인 몸 상태에 대한 세부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오늘의 작은 미션 중 하나는 임신진단 증명서 받아오기. 12월 말엽, 겨울방학 동안 잠시 한국 방문이 예정되어있던 터라 장시간 비행을 앞두고 고민되는 바가 많았다. 20주를 훌쩍 넘긴 시점이라 비교적 안정기라고는 하지만 보스턴에서 인천공항에 이르기까지 자그마치 15시간 비행기에 올라야 하는 상황. 장시간 탑승도 부담이었지만 무엇보다 보안검색대를 지날 때 혹여 금속탐지기나 방사선에 노출돼 몸에 해가 가는 일은 없을지가 최우선 걱정이었다. 다들 태교여행도 흔히들 다니는데 공항에서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돌발상황들을 가정해 보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려면 필요했던 것, 바로 내가 '임산부'라는 일련의 증명서.


한국에서는 다니는 병원마다 산모수첩도 주고 임산부배지도 배급하지만, 미.국.에.서.는. 손에 쥐어지는 아기자기한 아이템이 없어서.


사실상 출산 직전까지는 딱히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 또래 친구들만 봐도 막달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들 자기 관리 참 잘 하는구나' 싶은 임산부들이 대다수였다. 아직 30주가 채 되진 않았지만 나 역시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몰랐다. "나 실은 임산부야"라고 말을 해도 "말도 안 돼. 너무 말랐어" 소리 지른 동기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나 벌써 7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다니까?" 아무리 호소하며 배에 손을 얹어본들, 명쾌하게 드러나는 팩트가 아니었다.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것마저 그런 것인가? 증명서가 필요한 이유다.


담당의가 떼어준 임신진단서는 참으로 간결했다. 내 간단한 신상과 임신에 대한 소견, 출산 예정일. 단 몇 줄에 불과한 Letter 사이즈 1장. 닥터의 시그니처가 '떡' 하니 있고 병원정보가 담겨있으니 증빙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참으로 유용하게 쓰이겠지, 이 종이 한 장! 공항에서 내가 임산부임을 증명해 내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면, 혹여 모를 돌발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긴다면, 주저 없이 한 장의 증빙서류를 꺼내 들고 약 7개월 차 임산부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려야겠지. 한국 병원에서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는 '산모수첩', '임산부 배지' 같은 게 없는 이 곳, 종이 한 장에 이렇게 든든해질 줄이야.


23주차쯤의 주수사진. 배가 예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아서 주수사진 기록을 남기느라 꽤나 어려웠던 날. 겉으론 증명되지 않아요!


오래 지나지 않아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종이 1장은 역시 '별 것'의 역할을 해냈다. 대학원에서 학생들 전반의 학사생활을 담당하고 있던 딘(Dean)과 다음 학기 거취에 대해 면담을 했는데 만약을 대비해 '증명서'를 보여줄 수 없겠냐는 것. 딱히 공식 증명서처럼 번지르르한 규격을 갖춘 서류는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바로, 이때다' 싶어서 냉큼 유용하게 써먹었다. 뭔가를 증명받고 특정 사실을 공식화한다는 것은 늘 그렇다.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언젠가는 나를 단단히 지켜줄 것 같은 하나의 '방패'를 얻어낸 듯한 뿌듯함.


한국에 머물 시간이 길지는 않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임산부 배지'와 '산모수첩'은 기념 삼아 꼭 받아서 길이길이 간직해야지. 실제로 누군가에게 보이고 확인받을 일이 많지 않다 해도 손 안에 쥐고 있을, 그 확실하고 정확한 감성을 지향하며.


가끔은 내가 어떻다고 또렷하게 증명하고 싶은 순간들.
함께 만날, 벅찬 그순간의 설렘은 증명해낼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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