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산, 그 후 (1)
미국 출산, 생생한 이야기는
심심풀이, 출산과 관련된 3문 3답.
출산하고 가장 먼저 먹은 것은? 팬케이크.
출산하고 가장 먼저 마신 것은? 애플주스.
출산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진짜 배고프다.
그렇다. 출산 후의 내 모든 신경은 '식욕'을 채우는 데 집중됐었다. 너무나도 원초적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도분만 시도부터 35시간 이어진 출산과정은 '굶주림'이라는 한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간절히 배고팠고 목말랐다. 사나흘 지나 몸을 조금씩 가다듬고 나니 비로소 마음과 머리도 함께 굶주려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임신 30주 차를 넘어서면서 배가 무겁고 체력이 달린다는 이유로 대학원 유학생활에 충실한 것 외에는 그 어떤 두뇌회전 작업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 내 생각을 덧댄다거나 영어 표현을 틈틈이 외우며 언어구사력을 통통하게 살찌우지도 못했다는 이야기. 그저 출산 디데이만을 앞두고 하루하루 학교 출석하며 겨우 버텨나가던 날들. 그 디데이가 끝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허전하다는 느낌이 동동 떠올라서. 울컥했다. 무언가 다시 채울 때가 되었던 것.
아기 잘 때 무조건 자야 해
신생아 육아 전면에 뛰어들면 잠이 부족한 건 물론이요, 너무 힘들어서 부부싸움도 잦아질 것이란 이야기를 주변 친구들로부터 자주 들었다. 틈틈이 수면보충에 힘써야 한다는 조언도 자그마치 백 번 넘게 들어왔던 듯. 그런데 이 역시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람 바이 사람. 난 정말 '잠이 없는 사람', 아니 굳이 잠 안자도 잘 버텨내는 습성이 깃든 희귀종이 분명한가 보다. 워낙에 서너 시간 자고 금세 깨버리고 마는 독특한 수면 습관을 가진 나였기에 약 3시간 간격의 텀을 두고 아기를 먹이고 달래는 일상이 대단히 힘겨울 건 없었다.
몸 컨디션이 최상은 아니겠으나 이왕 새벽시간대에 깨있는 김에 한동안 못 읽은 책을 꺼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전공과 관련된 아카데믹한 논문만 찾아내고 읽어가다가 오랜만에 딱딱하게 굳어가던 감성을 톡톡 깨우려니 마음이 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저 좋았다. 출산3주차를 넘기고 본격 엄마 힐링의 출발은 새벽 독서와의 환상 콜라보레이션으로.
그렇게 꺼내 든 내 책. 출산하고 가장 먼저 꺼내 든 책은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 피아니스트 이소연, 가수 이소은 자매의 아버지 이규천 교수의 아빠 에세이.
“Forget about it.”
자신의 내면에 저장된 감정의 찌꺼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삭제 기능을 사용하듯, 잊음 기능을 수시로 눌러줘야 한다. 잊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은 짧게 생각하고 교훈을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
-알라딘 eBook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 (이규천 지음) 중에서
아기 육아의 필독서라고 하는 실용서 몇 권을 친정으로부터 국제우편을 통해 공수해왔으나, 아기 의식주와 관련된 이런저런 실용정보를 샅샅이 파헤치기 이전에 내 손은 '아기와 어떻게 소통해나갈지, 미래에 어떤 마음을 주고받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어떤 부모가 되어 자녀와 어떤 소통을 꿈꿔나갈지’에 대한 사색이 충분하지 않았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도 필요했다. 대학원 중간고사를 치를 때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는 게 싫어 보름 이상의 기간 강의록을 3회독했는데, 정작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공부는 단 3일도 투자하지 않은 것 같아서 민망해지는 시점이었다.
Forget about it!
잊어버리라는 말이 뭐가 대단하냐고 반문할 만도 한데 이 책을 읽어 가다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중, 이보다 더 위대한 주문은 없을 것만 같다. 나 자신의 실수에 대해 결코 관대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그렇다. 두말할 필요 없이 나 같은 사람일수록!) 되새기려 노력할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거리기 쉬운, ‘흡수 어려운’ 이 말 한마디. Forget about it!
자녀가 실수와 실패에 허덕이고 있을 때 “왜 그래야만 했냐”라고 냉정하게 따져 물으며 위기를 가속화시킬 게 아니라, 그냥 “잊어버리라”고 쿨하게 농담 던지듯 말건넬 수 있는 너그러운 여유. 혹은 정반대로 "다음번에 넌 더 잘할 수 있다"고 과한 기운 북돋으려 애쓸 게 아니라, '별거 아냐. 잊어버려” 가볍게 등을 툭 두드리고 지나갈 수 있는 몸짓. 이규천 교수는 마치 좌우명처럼, 가훈처럼, 스스로 효능 좋은 주문을 품고 있는 것처럼 두 딸에게 이 문장을 선물해왔다.
잊음은 언제나 새 출발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후회하고 되새김하는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적인 힘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다. 부모가 현재에 집중하면서 밝고 명랑하게 지내면 아이들의 표정도 밝다.
-알라딘 eBook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 (이규천 지음) 중에서
특히 가수로 활동했던 둘째 딸 이소은이 로스쿨에 가서 첫 시험을 망쳤을 때도 이 말은 주효했다고. 다음에 더 잘해서 이번에 못한 것 만회하면 되지!라고 성급히 격려하지 않았던 거다. 서툰 격려도 결국엔 “이번엔 네가 못해서 좀 아쉽네?” 마음을 전제해둔 셈이니까. 다음번에 네가 더 잘해서 만회하면, 너에 대해 살짝 실망한 마음을 다시 끌어올려볼게! 조건을 달고 애정을 주겠다는 이야기, 이걸 부드러운 척 포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빠는 너의 모습 전부를 사랑하지,
한두 가지 것으로
사랑하진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도대체 이번에 왜 못한 거냐고 따지지 않는 부모,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고 억지로 쓰다듬지 않는 부모. 그저 지금 너를 바위처럼 짓누르고 있는 그 무언가에 버둥거리지 말라고, 그럴 필요 없다고. 너는 ‘잘하지 않아도’ 일단 너 자체로 소중하다고 다시 한번 믿음을 주는 데 집중할 수 있는 부모. 잊어버리라는 그 말 한마디로 아이는 자신의 실수에 스스로 지치지 않는 법을 깨닫게 된다.
정말 그랬다. 아빠는 나의 모든 도전과 실패, 성공과 좌절, 기쁨과 슬픔을 사랑해주셨다. 그 가운데 아빠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만 사랑하신 적은 없었다. 아빠께서 내 어떤 모습도 인정하고 사랑해주실 걸 믿기에 그 많은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때론 실패하고 때론 좌절했지만 이 모습도 나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소은. 딴따라 소녀 로스쿨 가다. p.81)
엄마, 나 시험 망쳤어
미래 내 아들이 눈물 한 방울 뚝뚝 흘리며 이렇게 고백할 때, 나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처럼 태연히 “Forget about it”이라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을지. 오히려 대수롭지 않아 하는 아들에게 "넌 어떻게 시험 망친 걸 그렇게 빨리 잊어버리고 반성할 줄을 모르냐"며 다그치게 되면 어떡하나. 괜히 쿨하게 잊어버리라고 말했다가 진짜 그 순간을 몽땅 잊어버린 아들이 또 망친 성적을 들고 오면 나는 혼자 또 속을 끓이는 게 아닐지?
일단 잊어버려.
커피나 한 잔 마시러 나가자
삶을 살아가다가 마주하는 어이없는 우여곡절들의 난장판이 우릴 지치게 만들 때, 가장 가까운 사람들, 매일 살을 비비고 맞댔던 식구들끼리만큼은 이 말을 밥먹듯이 자주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네가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하든,) 난 네 편이라는 걸 꼭 기억해줬으면...! 싶은 마음. 그러니까 실수와 실패에 가슴 아파하며 발을 동동거릴 필요가 없다고, 마음 쓰지 말고 널 괴롭게 만드는 그것들, 일단 잊어버리라고 말을 건네야지.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잊어버리고 내가 널 믿고 사랑한다는 건 ‘기억하라고’ 따뜻한 라테 거품처럼 포근히 속삭여야지.
FORGET ABOUT IT
잊어버려도 된다고 이야기할 줄 아는 엄마 되기. 그렇게 말할 용기를 가진 어른으로 차근차근 성장해가자고 스스로 토닥여보는 새벽. 아이러니하게도 출산 후 처음 마주한 책이 내게 건넨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엄마 되기의 시작은 이 한마디로부터. “Forget about it!”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신이 거울 하나를 세상으로 던져 산산조각 낸다. 그리고 인간은 삶을 살면서 깨져 흩어진 거울 조각을 하나씩 찾아서 모으고, 삶이 끝날 때 비로소 완성된 거울에서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 (이규천 지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