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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08. 2021

부부 싸움 '덜' 하기 3단계

부캐는 미국 엄마 (14화)


장거리 연애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풍경. 간헐적 연애하니 싸울 일이 비교적 적었던 (아니, 거의 없었던) 커플이었다. 동화는 끝났고 더 이상 Happily Ever After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 싸움, 참 지독하게 하는 편이다. 한번 하면 '이 싸움이 오늘 끝나기는 할까' 싶도록 길게 한다. 축구의 전반전, 휴식, 후반전 정도가 아니라 중학교 시절 6교시쯤의 수업 스케줄을 연상케 하니까 말이다. 


이전 편 '부부싸움의 끝'에서도 밝혔듯,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럴 리가! 우리 아들은 원래 화를 안 내는데?" 하지만 얼마 전 좋아하는 일간지 기자님의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한 구절을 읽다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우리 애는 안 뛰어요'는 '우리 개는 안 물어요'와 비슷한 논리일 텐데..."라는 것. 층간소음에 관한 갈등 이야기였다. 부부싸움이라고 뭐 다를까. 남편의 매운맛을 평생 경험해보지 않으셨기에 ‘우리 애는 화 안 내요’ 생각하시는 거겠지. 그 매운맛을 가만히 앉아서 음미할 생각이 없는 나 역시 소리를 낸다. 그렇게 부부싸움이 시작된다.


달콤하기만 할 줄 알았던 부부 모드에도 ‘전쟁’은 자주 찾아든다. (Photo by The Dearest Still)


자주 싸우고 독하게 싸운다. 장거리 연애 시절엔 상상하지 못했던 일. 싸울 시간도, 싸울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리가 초등학교 동창 부부라서 더욱더 그럴 수도 있겠다고들 한다. 12살 때 처음 봤으니 (그때도 연인이었던 건 결코 아니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고 지낸 세월만 따져도 25년 차. 알고 지낸 세월과 정을 고려해, 심지어 '부부'인 우리는 '안' 싸울 수는 없어도 '덜'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빈도는 같더라도 최소한 강도가 약해졌으면 생각한다. 떡볶이 집에도 매운맛을 조절하는 메뉴판이 있지 않던가. 극강의 매운맛으로 자주 싸운 부부의 한쪽이 (그렇다, 내가) 고민 끝에 고안해봤다. 부부싸움 그나마 덜 하는 (혹은, 조금 약하게 하는) 3단계 원칙. 그 기술.



1단계. 싸움 전
내 앞에 내 직속 상사가 있다고 생각할 것


"남편이 곧 내 선배님입니다."... 섬기고 존경하라는 고루한 이야기가 절대 절대 절대 아님. 싸움 폭발력을 줄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거름망이 되어주기 때문. 쉽게 말해 ‘내 직속 선배와 싸워봐야 얼마나 심각하게 싸우겠느냐...’라는 생각에서 착안했다. 부장님이나 국장급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다. 나보다 입사가 2, 3년 정도 빠른 그야말로 '직속 상사'와의 관계만 떠올려봐도 충분하다. 전반적으로 생글생글 예의는 갖추지만 그렇다고 이의 제기할 일이 있거나 불만이 쌓일 때 갈등을 아예 덮어두기만 하는 사이도 아니다. (가까운 연차일수록 더더). 하지만 선배에게 순간 화가 날 일이 생겼다고 해도 선배님께 사사건건 하나부터 열까지 ‘화’를 쏘진 않으니까 폭발력은 약하다. 대체로 친한 친구에게 대신 툴툴거릴 뿐. “너희 선배도 그러니, 우리 선배도 맨날 그래."


하루만 남편을 ‘내 방송국 직속 선배라고 생각해보며 지내자’ 상상했던 날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싸우자고 덤빌 것 같았던 날이었기 때문. (이유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왜 싸우려고 했지.) 화는 났지만 선배님께 대부분 그러했듯, 바로 화내지 않았다. 실제로 회사 선배가 되었든 학교 선배가 되었든, 그 상대방과 ‘정말 싸워야 하는 일이 있다면’ 한참 망설이고 무슨 말을 할지 기록해야 할 정도로 생각정리가 필요하지 않던가.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해 순간 짜증이 나도 '냉소'와 '썩소'를 섞어가며 뒤돌아서서 중얼중얼 나만의 독설(?)을 퍼부을 뿐이다. 당장의 ‘싸움 선포’는 막을 수 있는 미미한 효과가 있다. (혹여라도 선배님과 사이가 아무리 안 좋아지더라도 "선배님, 지금 당장 옥상으로 올라오세요." 하지 않는 것처럼.)


때론 6피트 이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특히 싸움을 해야 할 때. 그가 내 직속 상사라고 생각하기 대작전. (Photo by The Dearest Still)


2단계. 싸움 중
(네가 싸움을 걸거나 말거나)
 ‘내 하루는 망가지지 않아’ 전투 모드


일단 운의 흐름이 꼬여 둘 다 싸움판에 올라섰다고 해보자. 어떤 일로 싸우고 있든, 얼마나 오래 싸웠든, 이번 싸움의 잠정적 위너(?)는 누가 되었든, 그 어떤 경우라고 해도 ‘불쾌’ 하다. 3초에 1번 꼴로 한숨 나온다. 때때로 자기 연민의 감정이 날 휘감는다. ‘흑흑, 난 지금 이 순간 한 때 사랑을 속삭였던 이 남자랑 왜 이토록 싸워야 했을까. 나한테 함께 살자고 로맨틱하게 프러포즈하던 그 남자가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지.’ 3년간 피 튀기며 부부싸움을 해 본 결과, 이런 감정은 담아둘 가치가 1도 없다. 냉정히 말하자면 ‘(네가 나에게 화를 내든 말든, 우리가 부부싸움을 해서 몇 시간이 흘러 낭비가 됐든) 내 하루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모드로 가야 한다.


부부싸움을 하면 누구나 슬프다. 때론 눈물 한 방울 찔끔 나오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서글픔도 배가 되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으로 내 하루의 컨디션과 바이오리듬이 망가지는 건 더더욱 최악이지 않겠는가. 좀 진부하긴 한데 이럴 땐 캔디 모드가 제격이다. “넘어져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너랑 내가 싸우든 말든, 네가 내 하루에 태클을 걸든 말든, “나는 안 울어.”


더운 여름밤 맥주 생각이 나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맥주가 하나도 없다 해도 나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내 생각을 맥주에서 다른 데로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텅 빈 냉장고도 내 행복을 망치지 못하며, 맥주가 없다고 저녁 시간을 망칠 필요도 없다.

(롤프 도벨리, <불행 피하기 기술> 전자책,
'카리브해에 산다고 행복하지 않다')


롤프 도벨리의 글을 '부부 싸움'에 대입해봤던 날, 나는 나를 감싸고돌던 그 모든 부정적 감정에서 벌떡 일어서게 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글을 이렇게 해석했다. '싸늘한 가을날 오후 너랑 내가 피 튀기듯 싸운다 해도 나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내 생각을 부부싸움에서 다른 데로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허해진 내 마음도 내 행복을 망치지 못하며 부부싸움을 이따 저녁에 또 한다 해도 한밤중까지 망치게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부부 싸움한 날은 최대한 달콤해 죽겠는 커플송을 듣고 나를 위해 더 정성을 다해 커피를 내려서 독서를 하는 이유다. 예쁜 그릇에 샐러드를 챙겨 먹고 햇살 받으며 그 누구보다 행복한 필라테스를 한다. 아무리 독하게 싸워도 그것은 내 하루를 망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 참 중요하다.


자기 연민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 속에서 오래 허우적거릴수록 더 나빠지기만 한다. 그러니 자기 연민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곧장 이 위험한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라.

(롤프 도벨리, <불행 피하기 기술> 전자책,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려면')


“부부싸움이 내 완벽한 하루를 망치도록 내버려 둘 수야 없지”


3단계. 싸움 후
진짜로 "오다 주웠어" 전략


쑥스럽지만 세심하게 사랑 표현하라는 게 아니다. 지독하게 싸우고 난 뒤, (평생 부부 싸움만 하다가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진짜로 '오다 주운 것' 챙겨주기. 여기서 핵심은 그 사소한 챙김의 포인트가 과하면 안 된다는 거다. 내가 약간의 화해 모드를 담아 무언가를 건네주려고 할 때 해당 아이템이 과하면 과할수록 나도 상대에게 ‘기대’를 하게 된다. 정말 거의 '주운 것' 같이 사소해야 한다. 이를테면 마트에 장 보러 갔다가 내가 먹을 초콜릿 고르는 김에 남편이 좋아하는 맛 하나 ‘옛다’ 챙겨 넣기 (3달러도 안 한다.) 내가 먹고 싶은 커피 픽업하는 김에 1+1 이벤트 적극 활용하기. (어차피 내가 두 잔 다 못 마시니까.)


“진짜로 오다 주웠어”


너무 짠 거 아니냐고? 나만 그런 거 아니다. 그도 그랬다. 한 번은 싸우고 나서 남편이 본인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러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오다 주웠다’ 식으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난 보기 좋게 착각했다. (그럴듯하게 속고야 말았네.) 나한테 아까 미안해서 주문해 온 화해의 커피인 줄 알고, 내심 기분 좋게 마시던 커피. 한참을 마시다가 기분이 돌연 '싸해져서' 살펴보니... (?) 커피 테이크아웃 잔에 주문 라벨이 없다. 그때서야 무릎을 쳤다! 아, 아이스로 주문했는데 직원이 실수로 핫을 만들어줬구나. 그래서 공짜 커피 한 잔이 더 생긴 거네.


의도치 않았으나 그날의 초보 바리스타가 우리의 화해 모드를 챙겨준 셈이었던 거다. 남편은 딱히 화해하려고 투자하지 않았지만 (단 1달러도 투자하지 않았으나!) 잠시나마 내 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어리바리 초보 바리스타님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




[부록] 이것만은 절대 하지 말자.


내가 부부 싸움한 이래 남편에게 가장 ‘짜증이 솟구쳤던 순간’은 딱 1년 전 요맘때. 한참을 싸우고 나가더니 하필 내가 엄청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자기 먹을 커피와 디저트를 냠냠하고 포장해왔던 날. 난 정말이지 ‘세상에서 이 순간 네가 제일 치사해’라고 500번 외쳤다. 부부 싸움의 화해를 선포하려면 내 커피도 사 오고 2인분의 디저트를 사 왔어야 했고, 혼자 당충전하며 화를 식힐 요량이었다면 자기가 먹은 티를 내지 말았어야 할 것 아닌가. 


배우자가 좋아하는 카페의 흔적임을 알면서 태연히 남은 먹을거리를 가지고 와 자기 책상에 풀어놓는 그 만행을 보며 난 적잖이 소심한 복수를 계획했다. ‘나도 똑같이 갚아주겠어.’ (하지만 난 그렇게 치사한 만행은 아직 해내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그때의 싸움이 종결되고 며칠 뒤 남편은 천진난만한 말투로 이런 말을 건넸다. “있잖아, 그 케이크 저번에 먹어보니까 엄청 맛있더라. 너도 먹어봐.” 어우, 다시 복기하다 보니 화가 나려고 한다. 다시 소심한 복수를 계획해야겠다. 이런 류의 ‘만행’은 배우자에게 절대 시행하지 말 것. 아무리 싸우더라도.




"우리 오늘 하루 사이좋게 지내자"라고 말할 연차는 지난 것 같다. 결혼 3년 차 (햇수로 4년 차) 눈빛만 마주쳐도 애틋할 시기는 지났다. 다만 이렇게 제안해볼 수는 있겠다. 오늘 우리 좀 약하게 싸우지 않을래? 각자 할 일도, 신경 쓸 일도 많은데 에너지 좀 아껴둬야 하지 않겠니? 하하. “널 너무 사랑해서 오늘은 싸우고 싶지 않아.”라고 로맨틱하게 마무리하면 좋을 텐데... 난 어쩔 수 없는 3년 차 헌댁 (새댁의 반대말)이 되어버렸다. 직장생활 3년마다 권태기가 찾아오고 애사심 아닌 퇴사심이 찾아온다던데, 결혼 역시, ‘3년 위기론’이 있는 걸지도. 하지만 괜찮다. 일단은 오늘 하루 '덜 싸워보기로' 한다.


조금 ‘덜’ 싸워보기로 한다. 한 단계 낮은 매운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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