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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05. 2021

부부 싸움의 끝

부캐는 미국 엄마 (15화)


어디까지 싸워봤는가. 조금 더 명확하게 풀자면, 얼마나 오랜 시간 싸워봤는가. 남보기에 아무리 '사이좋아 보이는 부부'일지라도 싸움이 부재한 부부는 없으리라 확신한다. 그 싸움이 가볍고 혹은 귀엽기까지 한 말다툼일 수도 있고 (아마도 애정표현의 연장선 상) 왠지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지독한 냉전을 연상케 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어떤 방향성을 품든 부부 사이에 '싸움'이 존재한다는 것. 모양새와 경중은 달라도 영영 없을 수도 없는 게 바로 '부부싸움' 되시겠다.


실컷 싸우고 나면 시간이 훌쩍. 하늘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기도.


우리 부부, 한번 싸우면 참 길게 싸우는 편이다. 그 싸움의 근원이 무엇이든 참 지루하도록 길게 이어진다. 여기서 '길다'는 것은 싸움이 늘어지는 날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싸움이 이어지는 '시간'이다. 부부싸움의 길이를 제대로 체감했던 건 바로 주차장에서 싸웠던 날, 10분당 주차비가 쭉쭉 상승곡선 타 주신 덕분에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싸웠는지 계산된 주차비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 식당을 이용하면 주차 2시간이 무료 지원된다는 곳이었지만 우리가 한참을 싸우고 나서 식당에 들어갔을 때, 카운터 직원이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더랬다. "엇,,, 이미 2시간 40분이 지나있네요." 그만큼을 싸우고 다시 별일 없었다는 듯이 밥까지 먹고 나왔으니 그날의 주차비는 말해 뭐해. (화해의 의미로 내가 쾌척했다)


그날의 주차비로 환산된 우리 부부싸움의 길이


"어머, 그렇게 순둥이 남편이랑
무슨 싸움을 해"

남편과 부부 싸움했던 이야기를 스치듯 흘렸을 때, 친한 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와 제법 가까운 지인인데도 부부의 세계는 부부만이 안다는 게 정답인 듯싶다. 아무렴,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특정 부부의 화내는 성향과 싸움의 구체적 양상은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법. 아무리 소셜미디어에 실시간 일상을 공유한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던가. 맵고 짠맛의 순간들은 굳이 업데이트하지 않는다. 싫은 순간은 적당히 아껴두고 나 혼자 소화해내기 마련인 것을... 당연히 남편의 매운맛 버전, 그가 화내는 순간은 나만 안다. "너희도 싸움이라는 걸 하고 사니?", "우와 너네 부부 진짜 달달하고 행복해 보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씁쓸하게 키득거린다.  "하하, 순한 맛일 때도 있지만 엄청 극강의 매운맛일 때도 있어요." (주차장에서 3시간 가까이 싸워봤냐고요.)



싸움의 소재는 너무나 다양하다. 이제 와서 각각의 싸움 카테고리마다 그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부부 각자의 사정이 있고 그날 운의 흐름이 하필 참 나쁜 쪽으로 흘렀을 뿐이라고 생각해두기로 한다. 내가 화를 돋운 날도 있고 그가 평소보다 까칠했던 날도 있을 거다. 운 나쁘게 서로의 기운이 엉킨 거고.


여전히 한쪽은 억울하고 나머지 반쪽도 영원히 상대방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서로 '화해의 기술'이 늘고 애정이 견고 해져서라기보다는 그냥 자주 싸울 수밖에 없는 관계, 그럼에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길들여지기 때문인 것도 같다. 즉, '물 베기'가 화합과 단결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냥 끄덕이고 무던해지며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부라는 전제에 숙연해지는 과정 같달까.


긴장을 일으킬 때마다 더욱 팽팽하게 하는 진짜 의문은 이것이다. “이걸 어떻게 평생 견디고 살지?”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p. 76


알랭 드 보통의 소설에서 재밌는 구절을 만났다. 한창 '부부 싸움이란 무엇인가'... 마치 대학교 1학년 새내기 때 듣던 교양과목 같은 의문문에 사로잡혀있던 때라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류의 과목을 하나씩 하나씩 접수해나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16년 뒤 나는 또 다른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에, 아니 그 물음표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니.


이 싸움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기인해 어떻게 끝나야 바람직한 것인가... 하루 이틀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싸움은 쥐도 새도 모른 게 끝난 것처럼 ‘휴전’되어 있고 (종전은 아니다) 그렇게 오늘내일, 새로운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또 종종 떠올려본다. 알랭 드 보통 소설 속의 의문문을. "이 싸움, 종종 찾아오는 이 긴장감을 어떻게 평생 견디고 살지?"



우리 아들은 화를 거의 안 내는데?
얘, 네가 예민하게 군 거 아니니


아차차, 부부 싸움에 관한 이야기는 시댁에 공유하지 않는 것이 제1의 원칙이거늘. 종종 여자 대 여자로 이야기 하자는 시어머니의 '쿨하심'에 홀린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둘 때면 결국엔 뒤탈이 찾아온다. 또 한 번의 '며느리 예민론'이 짜잔, 보란 듯이 등장해주시니까. 한편으로는 잔잔히 슬퍼진다. 아 이토록 아들에 대해 모르실 수 있다니! 물론 아들 내외의 싸움, 서로 얼굴 붉히는 장면을 아예 상상하지 않는 게 좋으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아들이 화를 낼 리가 없다'는 철석 같은 믿음은 곧 아들의 실제 감정표현과 평소 성향에 대해 전혀 모르신 채 사각지대에 앉아계신 모습으로 비치시던 걸. 어쩌면 때마다 며느리 예민론 카드를 꺼내시는 게 마음 편하셨을 것이다. '아들 사각지대'에 앉아계신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시기보다 누군가를 '탓'하며 '오죽하면 화를 안내는 우리 아들이 싸웠을까'로 생각을 전환하시는 게 더 쉬우셨을 테니까.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 (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알랭 드 보통, 위의 책, p.76>


매일 전쟁처럼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다. 지인들이 (약간의 착각을 보태) 바라보듯이 어느 때는 달콤하고 부드럽고 매우 순한 맛이며, 또 다른 날은 이 글에서와 같이 독하고 쓰디쓴 맛, 매워서 견딜 수 없게 괴로운 맛도 찾아든다. 완전히 매운맛일 때도 있지만 적당한 냉소와 핀잔을 섞어 낸 '매콤'의 날들도 당연히 있다. 부부관계의 맛은 이토록 다양하고 예상 밖이며 아슬아슬하게 이 영역 저 영역을 쉴 새 없이 넘나 든다.


답답한 실내 주차장에 앉아 2시간 40분을 치열하게 싸우고 나와 우리는 또 아무렇지 않게 '늦은' 브런치를 덤덤히 먹었다. 그것도 ‘마주 보며’ 말이다. 완전한 화해와 결속의 모드는 아니었으나 풀리지 않은, 또 풀리지 않을 관계의 숙제를 끌어안고 평소의 속도대로 식사를 하고 출차를 하고 귀가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날을 맞이하고, 또다시 다른 일로 싸우고 (그러면서 저번 일도 꺼내고) 적당히 덮어두기도 하는 날들을 반복해간다. 그냥저냥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있다.


긴 시간 싸움 끝에 우리는 ‘마주 보며’ 밥을 먹고 출차를 했고 귀가했다. 끝날 것 같지 않지만 결국 늘 휴전한다. (종전은 결코 아닌)


방송사에 근무할 때 월요일마다 정기회의를 했었는데 당시 감당해야 했던 약 30분가량의 회의시간보다 참 길고 지루하며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게임. 부부 싸움을 게임에 빗대자면 그러하다. 회사 회의는 다른 일을 핑계로 중간에 퇴장하기도, 혹은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기도 했었는데 일단 입장하면 두 사람 다 중도 후퇴할 수가 없어서 더 어렵고 막막한 게임.


그.래.서. 부부싸움의 끝은 과연 어디인 걸까. 누가 이기고 누가 진 걸까. 누가 맞고 누가 틀렸던 걸까. 이래도 저래도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숙제인 것만 같을 땐, 그냥 어르신들의 말씀에 기대 살아보기로 한다. "어찌 됐든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오늘 하루도 그렇게 ‘물을 베듯이’ 살아내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순한 맛의 우리일까, 매운맛의 우리일까. 상상은 여러분께 맡긴다.


오늘도 ‘칼로 물을 베듯이’ 살아간다
2021년 가을날의 우리. 오늘 우리 부부는 순한 맛일까, 매운 맛일까. (사진 촬영 by The Dearest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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