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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12. 2021

미국에서 ‘당근’을 한다면

부캐는 미국 엄마 (17화)


때는 올해 초 2월, 설 연휴 시작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대한 깨끗한 쇼핑백에 아이스백을 한 가득 넣고 둘둘 말아 단단하게 포장했다. 최소 2시간은 한치도 흐트러질 것 같지 않은 물건 보따리. 팔려는 물건은 사실 별 게 아닌데 ‘내가 너무 오버했나’ 싶을 정도로 과하게 꼼꼼한 포장. 한국에서 나의 첫 ‘당근 마켓’ 거래에 나서던 길. 상대방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의 마음은 단단한 포장만큼이나 결연했고 살짝 떨렸다.

나의 첫 당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상대방이 나오긴 나오는 걸까? 만나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지? 그 사람이 물건만 받아 들고 입금 안 하면 어떡하지? 만약 그러면 집요하게 쫓아가야 하나? 정말 이렇게 물건을 판매할 수 있다고?


여러 가지 물음표가 교차하는 가운데 “당근이세요?”라고 말을 걸어오던 사람을 만났다. 아기 엄마와 대화했는데 아기 아빠가 쭈뼛쭈뼛 나타났다. 현금이 15000원밖에 없대서 깎아드렸더니 어차피 계좌이체 하시겠다고 한다. 그렇게 첫 거래가 성사되었다. 첫 당근의 기억.


첫 거래로 오른 물건은 ‘아기 간식’이었다. 미국에서 한국 친정에 방문하기 전, 미리 야심 차게 주문해뒀는데 익숙했던 게 아니라서 그런지 아기는 좀처럼 입을 벌려주질 않았다. 다들 ‘당근당근’ 하니 나도 한 번은 해봐야겠다고 용기를 냈다. 먹을거리라서 조심스러웠지만 유통기한이 명시돼 있는 가공식품은 거래가 가능하다는 원칙을 앱에서 다시금 확인했고 구매가의 절반에 절반을 조심스레 적어 올려보았다. 다른 아기가 먹을 거라고 생각하니 어찌나 조심스럽던지. 꼼꼼하게 포장 겉면 유의사항과 제품 사이트의 조언들을 상세히 적어서 구매자에게 건네드렸다. 구매자가 도리어 고마워했다. “뭘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쌓여가던 소중한 당근 온도. 당근 해 본 사람은 안다. 이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상대방이 나오긴 나오는 걸까?
서로를 어떻게 알아보지?
물건만 받고 입금 안 해주면 어떡하지?



여기에 플러스, 조심성을 배로 더해도 자꾸만 뒤따르던 걱정들. “이 간식을 먹고 구매자 분의 아기가 혹시라도 탈이 나면 어떡하지?”, “내가 판매한 먹거리 탓이 아니어도 혹여 내 탓을 하며 항의 메시지를 보낸다면?”, “겨울이긴 해도 괜히 보관을 잘못해 아기 간식이 변질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돌아가시는 길 차 안 히터가 너무 빵빵해서 아이스팩이 송용 없어진다면?” 등등…. 오지랖이 심한 걸까. 걱정병 때문에라도 난 ‘장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몇 번씩 되풀이했다. 판매자로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 보였다. 한마디로 ‘당근’ 부담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거래가 가능해?
참 신기한 세상이네.
당근인들의 세상.


내 물건을 구매하겠다는 사람은 시간 맞춰 약속 장소로 나왔고, 내가 건넨 쇼핑백을 들고 인사 꾸벅, 총총 사라져 갔다. 나와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도 전에 ‘계좌이체’로 송금 완료한 상대 거래자. 쇼핑백 안 아이스팩을 꽁꽁 쌓인 물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고 쿨하게 구매완료. 완벽하게 ‘나’라는 판매자를 믿은 셈이었다. (내가 혹시라도 약속 장소 안 나오면 어쩌시려고.) 물건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업체도 아닌데 일반인인 나를 어찌 저리 신뢰할 수 있었을까. 인접한 동네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당근’에서의 신뢰는 이토록 간단히 형성되는 걸까.


훈훈했던 또 다른 당근의 기억 (1)


첫 거래를 안전하게 마치고도 난 한국의 당근 시스템이 마냥 신기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신뢰가 완전하지 않다면 결코 성사될 수 없는 거래일 진대, 난 그 이후로도 약 서른 차례 정도 모르는 사람을 만났고 최대한 단정한 모양새의 쇼핑백을 많은 말하지 않고 주고받았다. 구매자의 연령은 다양했고 (한 어르신께서 우리집 현관문 앞에서 수줍게 “당근”이라며 입을 떼실 땐 어찌나 귀여우시던지.) 말투나 미세한 태도 역시 사바사, 케바케로 달랐지만 한 번도 ‘펑크’가 난 적은 없었다. 기분 뜨악한 사기의 시도도 없었다. 동시에 상상했다. 미국에선 ‘당근’이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한국에서 나온 스타벅스 한정판 MD를 좋아했던 한 미국인과의 거래. 외국인과의 첫 거래는 참 인상적이었다.



이거 잘 작동해요?
같은 동네 사람이니 믿어야죠


커피포트를 판매하려 동네 빵집 앞으로 나갔을 때, 구매하러 오신 60대 중년 남성분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저도 요 아파트 옆 단지 살아요. 뭐 동네 사람끼리 믿고 사야죠.” 잘 작동하는 물건을 중고로 내놓은 건 맞지만 ‘가까이 거주한다’는 이유로 신뢰한다는 논리는 조금은 아날로그스럽다고 생각했다. 당근 마켓이 ‘동네 인증’ 절차를 거쳐 진짜 너와 내가 이웃임을 확인하고 이뤄지는 플랫폼이긴 하지만 어쩐지 이런 신뢰 신기하고 기묘하다. 때때로 한국이라서 가능한 건가, 위대하게 느껴지기도.


미국에서 당근을 한다면? 이웃 간 정을 담보 삼아 꾸려지는 소통과 거래, 이거 가능할까. 상상해본다. 옆동네 크리스틴 할머니에게 손녀에게 주신다는 아기 걸음마 보조기를 판매한다면? 알고 보니 옆 옆집에 산다는 안젤라 대학생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마케팅 리서치 책을 싸게 넘겨준다면? 각각 가격은 28달러쯤이 될 것 같다. 둘 다 2달러쯤 에누리해달라고 혀를 굴리며 플리즈 하면 나는 뭐 그쯤이야 하는 표정으로 쿨한척하겠지. 이민자로서의 첫 거래 성사 기념 할인 혜택을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훈훈했던 또 다른 당근의 기억 (2)



Are you a carrot??
저기 당근이세요?


미국에서도 당근당근 외칠 수 있을까? 이 드넓은 땅에서도 zip code 찍고 실거주지 인증하고 안 쓰는 물건 함께 나누고픈 심리, 언제라도 가능하기를 꿈꿔본다. 멜팅팟, 워낙 인종 국적 젠더 정체성까지 다양한 미국이니 큰 당근 조직 아래 미니 당근파를 소모임으로 꾸려도 좋겠고.


이 다양성이 플랫폼 운영에 방해가 될 것 같다면 Carrot market for baby 라도! 아기 물품 거래만 해도 인종 불문 나라 불문 수요 참 폭발할 텐데. 한국에서의 당근 경험치에 의하면 엄마들끼리의 당근은 왠지 끈끈해지는 육아 공감대도 첨부파일처럼 따라붙는다. 괜히 내 아기간식도 하나 더 덤으로 얹어주고 모르고 지내는 사람의 육아를 아낌없이 응원한다. 에누리까지 보태주면서 당근이 추구하는 이웃 간 정을 토대로 신뢰의 거래. 머리색, 눈동자 색 달라도 Carrot market for baby에선 마음 열리기 더 쉬울 수도 있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신생아 바구니 카시트. 아기 모빌, 미처 입히지 못하고 놔둔 아기 새 옷과 딱 한번 신긴 아기 신발.’

미국에서도 당근 하면 참 좋겠다. Hate crime이 증가하고 있다니 당근 하러 나가기 여전히 조심스럽겠지만, 필요한 물건 거래 앞에선 그 격하게 날 선 감정들이 고개를 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캐럿-하다’가 신조어 사전에 짠 등장해줄 날을 기다리며. “Are you a carrot? Yes, I’m a carrot!”


훈훈했던 또 다른 당근의 기억 (3)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당근을 한다면 여기서 뵙자고 하는 건 아닐지.     “콩코드 작은아씨들 집 앞 길가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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