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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18. 2021

펌킨과 애플이면 다 되는 미국

부캐는 미국 엄마 (18화)


“펌킨 스파이스 라테. 휘핑 없이. 시럽 1 펌프.”

단 음료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인데도 달콤한 요소를 최대한 빼 달라고 복잡하게 주문해 가면서 꼭 주문하는 음료가 있다. 미국에서 가을을 맞이하는 리추얼. 이 음료를 먹어줘야 비로소 ‘가을이 됐구나’를 실감하고 새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고 짐짓 예상한다. 얼죽아, 아아만 고집하던 남편도 9월 말엽쯤이 되면 잠시 입맛을 바꾼다. ‘펌킨 스파이스 라테 (Pumpkin Spice Latte)’의 위력이 이렇다.


펌킨 스파이스의 천국. 아기 이유식도 펌킨 스파이스 맛이 있답니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풍경, 애플 피킹 (Apple Picking). 말 그대로 사과 따기 체험을 하러 근교 농장으로 너도 나도 소풍 가는 것. 탐스러운 사과 자태에 설레고, 사과나무 옆에서 무덤덤히 찍는 사진들은 화보가 따로 없으니 일석이조. 마치 한국에서 추석 지내듯이 마땅히 치러내곤 하는 의식 같다고 생각했다. 스타벅스 프리퀀시 마케팅에 너도나도 달려갈 사람들은 적더라도 애플 피킹에서 느낄 가을 피크닉의 정취를 이웃집 따라 탐할 사람은 많을 것 같다. 가족 당 25달러에서 30달러의 값을 치르며 시간제한 없이 사과를 맘껏 따올 수 있으니, 가격 대비 소풍 만족도도 높은 편. “헨리네도 지난주 갔다니까 우리 집은 이번 주말 가보자.”


미국의 가을은 온통 펌킨과 애플 세상이다. 펌킨 스파이스 라테를 픽업해서 애플 피킹 농장으로 아이들과 향한다. 펌킨 패치(Pumpkin patch)도 있다. 사과 농장에 가듯이 호박농장에 가는 거다. 한국에서 유치원 다닐 시절, 유아 밤 줍기 대회 같은 건 나가봤지만 사과를 직접 따 본 건 미국에서가 처음이었다. 단 음료를 최대한 기피하는 내가 펌킨 스파이스 라테를 홀짝거리며 펌킨 스파이스 맛 커피 캡슐을 찾고 같은 맛의 초콜릿을 주문하는 것도 나 스스로에게 생경하다. 한국 별다방에도 펌킨 스파이스 라테가 며칠 전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펌킨 스파이스 라테
펌킨 크림 콜드 브루
애플 크리스피 마끼아또


올 가을 최애 음료 되시겠다. 작년엔 펌킨 크림 콜드 브루를 6개월 아기 곁에 두고 참 자주 원샷했다. 살찌기 싫다고 간헐적 단식을 원츄 하면서도 ‘너희들은 자비롭게 허용한다’ 라며 한 끼 굶더라도 먹는 예 외를 두고 있다. 별다방뿐만이 아니다. 보스턴이 본고장인 던킨도너츠에서 애플 사이다 도넛 (Apple Cider Donut) 한 더즌을 놓칠 수야 없지. 말 그대로 달콤한 사과향이 청량한 느낌까지 더해 감도는 맛 (물론 어찌 됐든 고칼로리라는 건 잘 알지만) 먹을 때만큼은 뭐 그렇게 살 팍팍 찔 것 같지는 않은 겉바달속보들 (겉은 바삭달콤, 속은 보들)의 맛.


인기 컵케이크 가게에서도 펌킨과 애플 맛은 빠질 수 없지


이쯤 하면 다들
펌킨과 애플에 미쳐있는 것 같아


마트에 가서 가을 가을 하게 바뀐 실내 장식을 즐기며 장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유모차를 밀며 내 카트를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아주 펌킨 천국이 따로 없고만. 사실이다. 내 장바구니 카트는 이러했으니까. 펌킨 베이글, 펌킨 크림치즈, 펌킨 스파이스 치즈케이크, 펌킨 맛 비스코티, 펌킨 스파이 스맛 와플 믹스에, 식빵에 바를 딸기잼 대신 펌킨 스파이스 스프레드까지. 거기다가 펌킨 과자집 만들기 키트까지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으니 누가 보면 펌킨 스파이스 맛을 먹어보지 못한 채 단명한 귀신같아 보이지 않을까 큭큭 거리고 말았다.


트레이더 조스 (Trader Joe's)의 가을가을한 펌킨 MD



애플 피킹 가서 따온 사과 20여 개. 실은 사과맛이 너무 별로라 사과 잼이나 사과 파이를 만들까 하고 부엌 한 켠에 대기 중인데 그날의 맛은 쉬이 잊지 못한다. 아기가 햇살 받으면서 사과나무 아래서 9월을 느끼고 있던 그 풍경을 말이다. 사과 따는 요령이 미숙해 설익은 사과만 따온 건 아쉽지만 미국 가을의 매력을 듬뿍 따온 건 말해 무엇하리. 작년에는 코로나 집콕하느라 엄두도 못 냈지만 이젠 야외에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라 사과농장 피크닉은 시기적으로도 제격이었다.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펌킨 스파이스 시럽이나 애플 사이다 시럽만 있으면 가을요리의 대가가 될 수 있을지도. 뭘 만들든 이 두 가지 성분 톡톡 추가하고 이름 붙여주면 누구나 가을 맛이네 감탄할 것 같으니까. 이른바, 미국판 ‘백 주부님 만능 양념장’되시겠다. 요리 요령이 미숙해 영 부엌과 안 친한 사람에게도 자신감 뿜뿜 심어주는 특급 비결. 사과향 뿜뿜, 펌킨 스파이스 향도 뿜 뿜. 쉬이 잊히지 않는 은근 중독성 강한 미국 가을의 맛이다.


엄마, 펌킨 스파이스 가지고
애플 피킹 언제 가요?


아기가 좀 더 크면 이렇게 제안하려나 상상해본다. 엄마 아빠가 가을만 되면 주문해마시는 그 커피 사 가지고 저... 기 농장 가서 사과 따자고. 오는 길에 도넛 가게 들러서 애플 사이다 도넛도 내 몫으로 하프더즌 사 달라고 하진 않을까. 아기가 미국 가을의 맛을 드디어 깨달았다는 지표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아기발달 성장에도 평균 지점을 참고하는 지표가 존재하듯, 미국의 가을 맛을 느끼는 지표가 이렇게나 바짝 다가서 있다. ‘펌킨’과 ‘애플’의 세상이 오늘도 무르익고 있다.


“아이스크림도 펌킨으로 먹을 테야”
펌킨 라테와 애플 사이다 도넛을 찾을 나이가 되면 그건 곧 네가 가을의 맛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는 성장지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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