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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24. 2021

눈에서 멀어지면 진짜 멀어져?

그 남자 그 여자의 간헐적 연애 (10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Emily in Paris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는 정말 화나는 인물 하나가 등장한다. 주인공 에밀리가 프랑스 파리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되면서 만나는 마케팅 회사의 상사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골탕 먹이지 못해 안달 난 남자 동료들도 아니다. 현 여자 친구와 에밀리 사이에서 줏대 없이 마음 오락가락하는 아랫집 썸남도 가끔 고구마 백 개 먹은 답답함을 부르지만 ‘화나는’ 인물 1순위는 아니다.


그 존재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에밀리의 ‘전 남자 친구’ (이하 엑스라 칭한다). 1화에서 여권 들고 곧 가겠노라고 싱글벙글 영상 통화할 때부터 진즉에 알아봤다. 롱디에서 오래 못 갈 남자라는 것을. 에밀리가 파리에 있으니 그 김에 모처럼 비행기나 타볼까 일시적 호기심 정도였겠지.


에밀리가 파리에 간다고 하자 당황한 전 남친 (넷플릭스, 2020)


(EX)
I don’t know how to do long distance.

도대체 장거리 연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Emily)
Well, you start by getting on a flight.
비행기 타면 되잖아


남자의 비겁한 징징거림이 시작됐다. 에밀리 일하는 동안 자기는 파리 가서 뭐하냐고 초등학생보다 못한 투덜거림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진짜 마음은 따로 있었다. 시카고가 좋단다. 에밀리더러 다시 돌아오는 게 좋겠단다. 이럴 거면 그러질 말지. 여권 들고 호들갑 떨며 에밀리까지 덩달아 설레게 하지나 말지. 처음부터 장거리 연애를 견딜 깜냥이 안됐던 거다. 상대가 꿈을 펼칠 새 무대를 응원해 주는 너그러운 마음가짐도 없고, (1년만 견디면 사랑하는 여자 친구 시니어 매니저 승진된다는데!) 시카고와 파리 사이 시차를 견디는 인내력도 없고. (고작 7시간밖에 차이 안 나는데, 나약한 남자 같으니라고)


14시간의 시차를 2년 반 견딘 롱디 종결자에겐 7시간 시차쯤이야


2화에서 최악의 대사, 최고로 화나는 장면. (넷플릭스, 2020)


I’m sorry if I don’t fit into your spreadsheet, but I like our life in Chicago.
미안하지만 난 시카고가 좋아


I think you should come home!
네가 돌아와야 돼


이 미드 1화에서 최악의 대사로 꼽고 싶은 한 마디. You should come home. 사랑하는 (아니,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1도 없다. 돌아오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연인과 얼굴 맞대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연인의 커리어도 중요하다. 물론 에밀리는 시카고에서도 잘 나가는 미디어 마케터였지만, 더 큰 세상에서 날개를 펼치고 경험치를 넓히려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프랑스어가 서툴러서 무시를 당하는 일이 다반사여도 파리에 파견 가고 싶었던 건 그만큼 간절했단 얘기기도 하다. 전, 남자 친구는 이에 대한 고려와 헤아림이 없다. 그저 시카고가 좋단다. 익숙한 환경에 안주한 루저의 전형일지도. 도전정신 가득한 에밀리와는 애초에 맞지 않는 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관계 끝난 거냐고 묻는 에밀리에게 전화가 잘 안 들린다고 핑계 대는 비겁한 시카고 가이. (넷플릭스, 2020)


We’re over?

롱디의 가장 슬픈 속성은 혹시나 그 관계가 끝나더라도 대면해서 끝내지 못한다는 점 아닐까. 대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쌓여가다가 결국 소통도 관계도 흐지부지해지는 경우가 흔해 보인다. 이 드라마에서 에밀리도 마찬가지. “우리 결국 끝이니?”라고 묻는 한 마디에도 전 남자 친구는 전화가 안 들린다는 핑계를 대며 수화기 너머로 증발해버렸다. 어차피 끝날 사이라면 보고 끝내나 안 보고 끝내나 큰 차이 없겠으나, 돌연 핸드폰 이별을 마주한 에밀리는 로맨틱 도시의 전형, 파리마저 구슬프게 느낀다. 바라보는 이마저 가슴 저릿저릿해지는 장면이었다.


에밀리가 이별 후 업데이트한 소셜미디어 메시지 (넷플릭스)


어쩌면 롱디는 현재 내 연인이 나와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 사람인지, 내 꿈을 얼마나 지지해주는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잣대일지도 모른다. 함께 익숙한 공간에 있을 땐 몰랐었던 마음들, 떨어져 보니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다. 각자의 공간에 머물 때  상대를 얼마나 배려할 수 있는지, 거리와 시간차 장벽에 어느 정도 덤덤해질 수 있는지 티가 난다. 1화를 다시 보자면 결국엔 에밀리에게 잘 된 일이다. 롱디 자격 안 되는 남자랑 지지부진 관계를 끌다가 기분만 더 엉망진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


물론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인에게 지켜야 할 도리와 예의라는 것이 있다는 건 숙지하길! 안 그러면 에밀리의 전 남자 친구처럼 스스로 그어둔 경계 밖을 좀처럼 탐험할 줄 모르는 루저 중의 루저라고 폭로하는 꼴이 될 테니까.




서로의 방학일정과 회사 휴가 계획을 공유하며 서로 다시 만나게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롱디 커플, 이른바 간헐적 연애 종결자들. 우리 부부의 인내심에 다시금 감탄해본다. 그때  달을 어떻게 참았지? 그저 저녁식사 맛있게 마주 보고  끼만 했으면 좋겠다고 몸부림치곤 했던   전이 벌써 아득하다. 다행히 “You should come here” 하지 않았고 차분히 인내했던 날들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은 부지런히 쌓였다.    하지 못해 서럽던 롱디 커플의 부부 일상이 보스턴 근교에서 가을 풍경과 함께 무르익어가고 있다. 종종 부부싸움의 끝을 달리고 전시상황인 것처럼 서로를 긴박하게 몰아붙일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더 이상 시차와 거리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전쟁과 평화, 간헐적 싸움과 간헐적 화해의 영역을 오가며 또 다른 지대의 새로운 연애를 맛 보고 있다. 비록 동화같이 보송보송한 'Happily Ever After'는 아닐지라도.


“You should come here”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용기
비록 동화같이 보송보송한 'Happily Ever After'는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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