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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Aug 29. 2020

롱디 할 땐 미처 몰랐던 비밀

그 남자 그 여자의 간헐적 연애 (9화)

<쇼퍼홀릭>으로 유명한 작가 소피 킨셀라의 소설 <Can you keep a secret?>을 펼치면 첫 장부터 주인공 엠마는 자기 마음에 고이고이 담아뒀을 그 비밀들을 이러쿵저러쿵 쏟아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법 거창한 것도 있지만 귀엽고도 소소한 것들이 대부분. 이를테면 남자 친구에게 자신의 속옷 사이즈를 더 날씬한 척 숨겼다든지, 나보다 승진을 먼저 한 동료의 화분에 몰래 주스를 물 주듯 주었다든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비행기에서 두서없이 비밀을 쏟아내는 장면은 정말이지 가관이다. 우연히 자리 잡게 된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안에서 그저 비행기 사고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데없이 후루룩후루룩 발설하고야 마는 온갖 비밀들. 난 (연인이 있지만) 한 번도 진짜 사랑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는 둥, 사랑받은 적도 없는 것 같다는 둥. 결국 모든 건 난기류에 의한 잠깐의 해프닝이었고, 얼떨결에 비밀을 발설한 주인공은 머쓱해진다. 하필 또 그 비밀을 다 듣고만 사람이 머지않아 직장상사가 되었을 사람이라니. 영화 도입부 내레이션에서 본인 스스로 되뇌었던 것처럼 자신의 '취약성'은 고군분투하고 지켜냈었어야지! 그렇다. 같은 제목의 영화 속에서 조곤조곤 일러주듯,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몰랐으면 하는 비밀들을 저 안 깊숙이 소지하고 있고, 안 들키고 싶어서 쩔쩔매며 살아간다.  


영화 OTT 플랫폼 내 영화 정보 (HBO MAX)


롱디 땐 비밀이 많았다. 안 들키고 싶어서 아등바등한 건 아니었다. 장거리 연애를 하다 보니 의도적으로 '숨기려고'한 게 아닌데도 자연히 서로의 '진짜' 일상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을 수밖에. 애초에 숨길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니니, 선의의 거짓말과도 다르다. 나도 너도 '비밀'로 삼고자 애쓴 게 아닌데 간헐적 연애관계를 이어가다 보면 자신의 취향과 습관 역시 뜨문뜨문 간헐적으로 노출하게 된다.


코로나 집콕 생활만 6개월, 간헐적 연애와는 정반대 지점에 놓여 찰떡같이 매일 붙어지내고 있는 요즘. 연애시절의 남편에게서는 발견 못했던 습관과 성향들을 더없이 많이 깨달아간다. 그는 애초에 비밀을 만든 적이 없으나 아아, 나는 미처 몰랐던 '비밀'들을 캐내듯이 하나하나 새로이 알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정리해본 5가지 비밀 리스트. 롱디, 장거리 연애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남편의 비밀스러운 성향. 물론 남편은 감추려 노력한 게 아닐지라도.


1. 그는 미니멀리스트다.

2. 그는 생각보다 대식가다.

3. 어라, 이 남자 '단 거' 참 좋아한다.

4. 말이 필요 없다. 정말 잠을 많이 잔다.

5. '진짜로' 빨간색을 좋아한다.



#1. 그는 미니멀리스트다.


남편은 모델하우스처럼 살아가는 스타일. 나는 아무것도 못 버리는 스타일. (중1 때 물상 과목 노트도 못 버리는 나.) 반대로 남편은 더 이상 쓰지 않을 게 분명하고 지금 필요하지 않다면 과감히 버린다. 나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잡동사니 아이템들을 붙잡아 두는 편이니, 확실히 둘은 다른 성향. 연애할 때 '맥시멀 리스트'로 살아가는 나의 공간에 놀러 왔던 날들, 설레기보단 화가 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와 보니 극강의 인내심으로 나의 꽉 찬 공간들을 순순히 버텨준 거였구나. 미니멀리스트여, 미안했다. (+맥시멀 리스트와 사느라 고생이 많다.)


#2. 그는 생각보다 대식가다.


방송할 땐 아무래도 체중관리에 민감했다. 그렇게 10년을 생활하니 저절로 '소식가'가 되어버렸다. 남들이 우스갯소리로 새 모이만큼 먹는다고 놀릴 땐, 살짝살짝 스트레스도 받았는데 다행히도 당시 남편과 간헐적으로 데이트할 때만큼은 스트레스를 안 받았다. 그도 나처럼 조금 먹었으므로. 커플이 오래가려면 딴 취향보다 기본적인 식생활이 잘 맞아야 하는 법인데 이런 면에는 그는 천생연분...? 하지만 결혼 후 알게 된 대단한 반전. 그는 평균 남성들에 비해 적게 먹는 편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많이' 잘 먹는다. (나는 내 남편도 긴 유학생활 끝에 '소식가'가 된 줄 알았지.) 당시 나와 간헐적 연애를 하던 시절, 한국에 나와 데이트하고 들어가면 늘 살이 쪽 빠져서 미국 생활에 복귀했었다고. 그랬구나. 그랬었어.  


커피를 흡수하는 양도 엄청난 우리 부부.


#3. 그는 단 걸 좋아한다.


생각보다 '달콤한 맛'을 좋아한다. 취향을 일반화하는 건 위험한 거지만 주변에서 단 과자 별로라고 멀리하는 남자 어른들을 많이 봐서, 남자들은 그저 단 거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데이트하던 시절에 달콤한 디저트를 함께 먹어도,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맞춰주는 건 줄만 알았지! 코로나 집콕하며 초콜릿 대량 주문하면 며칠 가지 않고 뚝딱뚝딱 사라진다. 마카롱도, 초콜릿 촥촥 발린 비스킷도, 극강의 단맛 오땡땡 과자도 우리 집 인기 필수템. 단맛을 함께 좋아할 수 있는 남자, 달콤하네.


달콤이들을 무한 공유할 수 있는 관계.



#4. 정말이지 잠이 많다.


나는 잠이 없고 그는 잠이 많다. 기본적으로 각자 채워야 하는 기본 수면치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 나는 3시간만 자도 다음날 제법 정상생활이 가능하지만 남편의 경우, 수면시간이 부족하면 그다음 날 무한 해롱해롱. 심야 육아가 이어지면서 그에게 인생 최대의 힘든 날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기억하렴, 아들아.



#5. 진짜로 빨간색을 좋아한다.


3번과 마찬가지로, 좋아해 주는 것 중 하나인 줄 알았던 것. 핑크색을 비롯해 붉은색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가만가만히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건가 보다, 연애할 땐 짐짓 생각해두었더랬다. 또 다른 반전, 남편도 정말 붉은 계열의 컬러감을 좋아하는 거였다. 실로 연애할 땐 같이 취향 공유하는 아이템이 옷이나 액세서리에 불과하지 않던가. 아기 유모차를 살 때도 소소한 전자기기, 가구를 살 때도 쨍한 붉은색 감을 진정 예뻐라 하는 남편. 이건 알지 못했던 비밀이었다기보다 내가 둔감했던 탓.


영화 속, 소설 속 주인공은 비밀을 감추려고 전전긍긍하지만 간헐적 연애 속에선 의도치 않게도 감추어둘 수 있는 사실들이 많았다. 더 이상 비밀의 영역에 놔둘 수 없는 각자의 취향, 서로의 습관. 비밀이 아니라서 더 반가운 요소들도 종종 있으니 이런 게 어쩔 수 없는 인연인가 싶기도. 작정하고 비밀 만들기도 좋은 관계지만, 몰랐던 비밀을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 간헐적 연애 관계에서 코로나 집콕 부부로 나아가는 중.


Every single one of us has a secret in our world that we don't want anyone else to see. We think if people find out who we really are, they won't stick around.  We make our way through life trying to hide our vulnerabilities. Sometimes it works, sometimes it doesn't. but at the end of the day, we are all just trying to do best we can.

 " 세상 누구나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기 마련이에요. 가끔은 이렇게 생각하죠. 우리가 진짜 어떤 사람인  알면  주변 사람들 절대  곁에 있지 않을 거라고요. 그래서 우린 치명적인 비밀들을  꽁꽁 숨기려고 노력하며 살아요. 근데 가끔은 그게 되죠. 가끔은 씨도  먹힌답니다. 하지만 그럴걸 짐작하면서도 우린  비밀을 꼭꼭 지키려 노력하며 살아요.

영화 < Can you keep a secret?> 대사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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