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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Aug 22. 2020

사라지는 자, 흔적을 남긴다는 것

그 남자 그 여자의 간헐적 연애 (8화)


찌릿찌릿 눈물샘을 자극하더니 결국엔 나를 울려버렸다.  영화 정말이지 제대로 슬프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 (The time traveler's wife, 2009)>. '간헐적 연애' 담긴 영화를 탐색해보기로 마음먹은 이후,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로 느낀  주인공들의 해소되기 힘든 '답답함'이라는 키워드였다. 만나고 싶은데 당장 만날  없는 아쉬운 순간들. 장거리 연애를 하다 보니 쉽게 서로를 만날  없어 답답하고 (고잉  디스턴스), 학업을 위해 멀리 유학  썸남을 그리워 하지만 막상 자신의 안부를 정확히 전달하지 않고 혼자서  사는  끙끙대기만 하니 답답하다 (러브, 로지). <시간 여행자의 아내>  이상이다. 함께 자리할  없는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  최대치를 담았다. 답답할 뿐만 아니라 서럽고 아프다.


포털 사이트 내 영화 정보 (네이버)


영화 , 남자 주인공 해리 (Eric Bana) 클로이(Rachel McAdams) 어릴 때부터 앨바의 엄마로 성장하기까지, 옆에서 때론 친구로, 연인으로, 남편으로,  아이의 아빠로 함께  준다. ‘ 둘을 지겹지도 않나?’ 싶을 정도로 둘밖에 모른다. 영화  포스터에도 다소 징글맞을 법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클로이의 첫사랑은 해리. 해리의 마지막 사랑은 클로이. “, 정말 한눈 한번  팔았다 이거지?” 그런데  가지 맹점이 있다. '지속적'으로 함께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함께 한다는 . 제목 그대로 '시간여행자' 해리는 현재에 가만히 머물지를 못하고 계속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회귀한다. 마음에 드는 순간에  하고 떠날  있는  아니니, 계획된 여정이 아니다. 결국엔 예정되지 않은  '시간여행' 때문에 고통받는  바로 옆에 자리하는 사람.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떠날지 모르니 클로이는 자꾸만 외롭고 허전하고 아프고 화가 난다.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단연 Disappear (사라진다)였다. 간헐적 연애, 사랑하는 사람의 '간헐적' 등장을 고려할 때 가장 마음 저릿한 단어가 아니었을까. Stay (머물다)와 정 반대 지점에 있는 단어. 해리도 클로이 곁에 '지속적으로' 머물고 싶지만, '간헐적으로' 이따금씩 사라져 버린다. 결혼식 첫날밤에도 반지와 턱시도만 남기고 스르륵 사라져 버리는가 하면 하필 바빠 죽겠는 이삿날에도 욕실에서 휘리릭 자취를 감춘다. 크리스마스 디너도 함께하지 못한 채 2주를 넘겨 새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이 남자. 남자의 고질병을 알고 시작한 연애와 결혼인데도 클로이는 어느 순간 화가 나기 시작한다. 입고 있던 옷, 들고 있던 저녁 접시마저 툭 떨어뜨린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그 말. 잇. 못 광경. 어느 누군들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관대할 수 있을까.

잔인한 시간여행,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있어도 곧 산산이 분해되어버리고마는 풍경들. 사람이 사라진다면 관계마저 흩어져버려야 하는 걸까. 그 지독한 운명을 이겨낼 장치가 존재한다면


누군가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 현실 속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은 언제나 있다.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유령처럼 ‘뿅’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해도 선명하게 내 옆에 자리하던 존재가 희미하고 모호하게 흐려지는 순간들. 공항에서 남편을 떠나보내고 돌아서야 했던 그 풍경이 그와 조금은 닮았다. Pause 없이 쭉 Play만 되면 좋겠는데 관계가 자꾸 일시 정지되는 느낌이랄까. 상대방이 머물러야 공감도 이해도 증폭될 것 같지만 누군가가 비행기로, 버스로, 혹은 영화에서처럼 말도 안 되는 '타임슬립'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면 남겨진 사람은 그 허전함과 밀려드는 허무감을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는다. (물론 떠나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그도 마찬가지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흔적'은 언제나 남는다. 클로이는 해리가 '사라져 버리는' 그 순간들마다 그가 남기고 간 옷을 거머쥔다. 육체는 귀신처럼 사라져 버리고 둔탁한 울림음과 함께 '털썩' 바닥에 떨어져 버리는 옷 뭉치가 참 얄밉고도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갈 거면 아예 싹 다 가지고 가든지!) 그런데 자꾸 이 순간들이 반복되다 보니 그나마 체온과 특유의 향이 담긴 옷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곁에서 나를 떠났다는 '공허감', 클로이는 옷을 매만지면서 동시에 본인의 마음까지도 쓰다듬는 듯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초원에 덩그러니 떨어져 버린 남편의 옷가지를 끌어 안으며 해사하게 웃는 그 모습이 영영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 흔적 덕분에 '왔다 갔다',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상대방의 간헐적 등장에도 조금은 침착해질 수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곧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상대방을 바라볼 때란



흔적을 매만진다는 것. 사라져 버린 상대방을 기억하는 방식은 '간헐적 연애' 관계에서도 제법 힘이 된다. 넉 달에서 길게는 여섯 달까지도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공백, 누군가의 부재를 쓰다듬는 데는 '데이트 몰입 기간'에 남겨둔 추억들이 큰 몫을 한다. 바짝 서로를 마음껏 만날 수 있었던 기간에 열심히 남겨둔 사진들, 함께 공방에서 만들었던 반지나 일러스트들도 구멍 뚫린 듯 허전한 마음을 살살 메우는 데 제법 괜찮은 역할을 했다.


조금은 유치한 듯도 하지만 자주 만나지 못하는 장거리 연애관계에서는 원데이 클래스 같이 무언가를 '배웠던' 기억이 참 좋더라. 중고등학교 시절 입시를 위해 차근차근 배워나갔던 기본적인 교과목들만큼이나 기억에 두고두고 남더라는... 함께 마카롱 원데이 클래스에서 가서 만들어뒀던 그 달콤한 디저트들은 냉동실에 얼려두고 최대한 천천히 오래도록 맛보곤 했다. 남편이 미국으로 떠나고 난 뒤에도 헛헛한 마음 위에 연고를 살뜰히 발라주는 듯, 달콤한 몫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에서 함께 들었던 마카롱 원데이 클래스. 함께한 흔적들을 최대한 달콤하게 기억하는 방법
사라짐을 견디게 해주는 함께한 시간의 ‘흔적’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남편이 선물하고 간 드라이플라워도 특효약. 바삭바삭 거리는 질감, 퇴근하고 난 뒤 깜깜한 방 안에 산산이 흩어지던 파스텔 톤의 고운 빛깔은 종종 마음이 지쳐 바닥에 쏟아진 것 같은 날, 가루가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을 촉촉하게 보듬었다. 물기를 쫙 뺀 무언가에도 사람의 진정성이 얹히면 반들반들 습기를 머금을 수 있는 거구나... 생각했던 결정적 아이템. 그가 남기고 간 소소하고 다양한 '흔적'들은 간헐적으로 혼자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반갑지 않은 사명감(?)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응원' 같은 기능을 했다. 찢어진 종이를 티 안 나게 붙일 수 있는 양면테이프처럼, 뜯겨나간 흔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글루건처럼 빈틈을 잘 메우려 애쓰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해내고야 말았다.


영화 속 레이첼 맥아담스. <어바웃 타임>에서도 시간 여행자 파트너를 마주한다. 여리여리하지만 그 어떤 변수도 견딜 것 같은 강단 있는 분위기 때문일까. 이쯤하면 타임슬립물 전문


머물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난 모든 것은 참 슬프다. 하지만 사라지는 순간에도 결정적 '흔적'을 남기니 참 다행이다. 참 고맙지 뭐야. 마음이 찢어지는 순간에도 '눈에 보이는 흔적' 덕분에 하루, 일주일, 한 달을 버티고 이길 수 있는 거니 말이다. 간헐적으로 함께 하는 관계에서는 그러므로 틈틈이 사진과 영상 촬영은 필수다. 곁에 자리하던 사람이 휙 떠나버리고 난 뒤에도 그 예정된 충격을 현명하게 토닥토닥일 수 있는 괜찮은 진통제가 된다. 좀 더 부지런 떨어서 원데이 클래스도 오밀조밀 함께 수강해보기. 수업의 결과물은 좋든, 싫든 내 곁에 남는 법이니. 간헐적으로 내 곁을 떠나려는 자, 그와 오래도록 함께하는 방법.


, 글을 끝마치기 전에 하나 ! 아이를 낳고 나니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자녀' 이야기에 유독 집중하게 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결혼과 출산 전에 봤던  영화는 지극히 헨리와 클로이의 이야기였는데 엊그제 다시  이영화는 헨리와 클로이, 그리고 '앨바' 이야기이기도 했다. 간헐적으로 종종 사라지는 시간 여행자 아빠를 이해하려 노력하던 다섯  딸의 모습, 아홉  딸의 모습,   딸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자식의 입장에서 자꾸  앞에서 모습을 감추는 부모를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할는지... 간헐적 부재를 어쩔  없이 이어가야 하는 수많은 워킹맘, 워킹대디들이 가슴 저릿한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


 글을 얼른 마무리 짓고 나서 이번 주말도 고농도의 밀착 육아를 감사히 즐겨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언젠가 아들이나 나나, 꿈같은 시간 여행자, 공간 여행자가 되어 때때로 disappear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물론 코로나 위기로 간헐적 데이트는커녕 이제는 매일 24/7 찰싹 붙어지내는 남편의 '흔적'에도 감사하며.


내 남편은 시간여행자가 아니라 참 다행이군
누군가가 눈앞에서 잠시 사라져 버린다는 것. 간헐적 이별을 인정하고 묵묵히 내 삶을 살아간다는 것
사라짐의 허기를 딛고, 상대방이 남긴 흔적들을 탐색하고 더듬거리며 장거리 연애시절, 그대를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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