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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20. 2021

꽃씨를 선물하는 남자

그 남자 그 여자의 간헐적 연애 (14화)


얼마 전 마트에서 꽃다발 하나를 덥석 집었다. 한국에서는 근처에 있는 플로리스트 숍을 검색해 방문하곤 했는데 미국에선 발걸음 닿는 마트마다 꽃 판매가 흔하니 매번 유혹에 시달린다. 아, 마치 한국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하는 노상 꽃 트럭도 연상케 하는구나. 10달러 내외 가격에 비닐로 둘둘 말린 포장, 저렴이 버전 꽃다발이지만 일주일 기분 업하는 데는 제격이다. 실은 생필품이 아니니까 마트 쇼핑 리스트에 올려뒀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에잇, 아기 까까라도 하나 더 사지, 굳이 뭘…” 하며 지우기 일쑤였는데 그날은 사고 싶었다. 꽃이 고픈 날이었다.


마트에서 구매한 튤립 열 송이로 일요일 아침 기분 업업


장거리 연애 시절엔 꽃배달이 풍년이었다. 한마디로 ‘서윗’한 날들이었다. 현 남편인 전 남자 친구의 서프라이즈 꽃다발, 그리고 꽃바구니. 생일이나 다른 축하할 일이 생겨서도 아니었다. 무슨 날이 아닌데도 선물 받는 꽃은 사람을 배로 기분 좋게 해 주는 힘이 있다. 정오의 희망곡 생방송을 하러 스튜디오로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불쑥 도착한 꽃다발이라든지, 라디오 뉴스를 준비하며 살짝 노곤 노곤해져 있는 오후, 내 얼굴보다 두배쯤은 큰 꽃바구니가 깜짝 나타나는 시추에이션이라든지. 그럴 때마다 국장 님, 작가 님, 카메라 감독 님들은 물어보셨다. “박수현 아나운서 오늘 생일이야?” 그럼 난 더 신나서 대답. “아니요. 아무 날도 아니에요!”



미국 여행하느라 수고 많았지. 한국 가자마자 시차도 안 맞을 텐데 다시 방송 복귀하느라 고생이다. 이 꽃 보고 조금만 더 힘내 줘. ㅡ너의 OO


롱디의 매력을 잦은 꽃배달이라고 생각했다. 여름휴가를 내고 당시에도 미국에서 머물던  남편과 시간을 보낸 뒤, 회사로 다시 출근했던 날! 그날도 어김없이 내 자리에 꽃이 찾아왔더랬다. 같이 노느라 고생했다고 받는 꽃다발이라니… 결혼하고 나서 약 2주간의 허니문 휴가를 보낸 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남은 방송들을 마무리해야 했고 남편은 먼저 미국으로 가야 했는데 신혼부부가 이별하는 슬픔을 꽃배달이 덜어준 거다.



좌우지간, 꽃 선물만큼은 원 없이 받았던 장거리 연애의 날들. 롱디 중 묘하게 냉해진 기류로 관계가 싸해졌을 때는 내 마음을 풀어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라도 가득 담아낸 듯, 배달된 꽃바구니 규모가 더 컸다. 매번 궁서체 글씨로 남편의 메시지를 정성스레 적어오시는 춘천 꽃집 아저씨랑도 정이 들어버릴 정도였으니, ‘이 남자 롱디에 참 공 많이 들였구나’ 회상한다.


제법 길었던 2년 반의 롱디 그 이후, 당연히 꽃배달 의식은 삭제되었다. 미국에도 한국 같은 맞춤형 꽃배달 전문 서비스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신혼 초에는 동네 꽃집에 가서 정성스럽게 꽃을 주문해뒀다가 내가 앉을 조수석에 놓아주기도 했고, 또 팽팽한 부부싸움 기간엔 마트에 혼자 장 보러 나간 남편이 ‘오다 주웠다’ 식으로 그날그날 꽃을 조달해주기도 했다. 꽃집 할머니, 꽃배달 아저씨의 기운이 한 땀 한 땀 실려있지 않아도 기분 푸는 데는 제격이었다. 마트표 레디메이드 꽃다발도 제법 힐링효과가 있었다.


그랬던 내가 스스로 꽃을 사다니. 내가 내 자신에게 꽃 선물을 하는 취지야 얼마든지 예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잦았던 꽃 선물이 뜸해진 게 아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 이사 온 집 찰랑찰랑 햇살 드는 식탁에 꽃 몇 송이 꽂아두고 싶은데 이 남자는 꽃을 서프라이즈 할 기색이 없어 보이고… 그럼 내가 스스로 조달하는 수밖에. 일요일 오전 아기 요구르트와 우유를 사러 나간 김에 남편 카드를 사뿐히 쥐고 내 눈에 가장 예쁜 튤립 결제 플렉스. 이게 뭐라고 그렇게 기분이 산뜻하던지. 구매와 픽업만 내가 했을 뿐 남편이 안겨준 꽃다발이라고 착각해주자 다짐 다짐.



마트표 레디메이드
꽃다발도
제법 힐링효과가 있었다


분홍분홍 한 튤립 열 송이, 아마도 12.95달러. 아기 낮잠 든 오후, 약 10달러어치에 달하는 예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남편이 다가와 비닐 ‘봉지’ 5개를 건넨다. 이상한 삽이 모양별로 두 개나 된다. 꽃씨와 꽃삽이었다. 그것도 내가 요즘 좋아라 좋아라 주문 걸듯이 애정 표현했던 튤립과 수국. 꽃씨를 심자고 한다. 꽃만 심기 심심할 것 같은 아내를 위해 오이랑 방울토마토, 애호박 씨앗까지 사 왔다. 종류별 씨앗과 꽃삽 두 개를 들고 야심 차게 서있는 이 남자를 바라보며 ‘아, 이젠 영영 남자 친구 아니고 진짜 남편이겠구나’ 실감했다.


“엄마, 밖에서 뭐 하는 거예요?”


며칠 뒤 해 질 녘, 집 앞뜰에 나가 튤립 씨앗 여러... 개, 수국 씨앗 색깔 별로 10개씩, 20개를 심었다. 학창 시절 아무리 식목일 행사했다 해도 뭔가를 혼자 직접 심어본 건 처음이었다. 앞뜰 흙을 파다가 지렁이를 30마리쯤은 본 것 같았던 날, “오오, 우리 집 생태계가 제법 좋은가봐?” 감탄은 덤이었다.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에 질질 끄는 슬리퍼를 신고 구부정히 앉아있자니 미국 농장에 와서 억지로 끌려와 일하는 사람 같지 않냐고 잠시 남편과 낄낄거렸다. 한 때 올랜도에서 춘천 꽃집 아저씨에게 대필을 부탁하던 남자였고 방송 들어가기 전 자주 꽃배달 전달받고 내심 의기양양했던 여자였다. 이젠 꽃삽을 들고 있었다.



아, 이젠 영영 남자 친구 아니고
남편이겠구나


롱디 2년 반 후, 3년 차 부부가 꽃을 마주하는 방식. 이젠 누군가가 살포시 배달해주는 꽃다발도 달콤한 메시지에 녹아버릴 것 같은 꽃바구니도 아니었다. 우리 앞엔 다름 아닌 ‘꽃씨’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쯤 자라나려나 아시는 분!


집 밖 구석구석 자리한 꽃들. 우리의 꽃씨도 언젠간 고개를 내밀어줄까
꽃배달 아니고 꽃씨와 함께하는 3년 차 부부 (구, 롱디 종결자)
“엄마 회사 자리에 꽃배달 풍년인 시절도 있었단다”
“아빠, 이제 꽃다발은 선물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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