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동생 앞으로 쭉 끌고 가. 옳지! 잘한다! 그렇지!"
아침 8시 10분. 평소 같았으면 이제 막 어린이집 등원가방에 아이들 물통을 챙겨 넣고 있을 시각. 아이들 뭐라도 챙겨 먹여 보내겠다고 아침 사과를 종종 썰어두기 바쁠 이른 아침에 이미 인천공항 면세점 구역을 걷고 있었다. 만 4세, 만 2세 아이 나란히 데리고 체크무늬 기저귀 가방 하나 어깨에 둘러멘 채 그것도 나 혼자서. 들고 타는 짐을 최대한 줄이겠다고 어깨에 메는 가방 하나를 메인 백으로 삼고 짐을 쌌더니 내 짐은 하나인데 산등성이 바위 하나 이고진 듯 무거워 죽겠다.
바깥 기온은 영하 10도 안팎이라는데 롱패딩 안은 이미 한여름 폭염경보 수준. 애들이 언제 지겹다고 할지 몰라 남매 좋아하는 최애템을 비닐도 뜯지 않은 채 차곡차곡 쌓아 넣은 탓. 목마르다고 둘이 고래고래 기다림 없이 소리라도 지를까 봐 평소 먹는 휴대용 우유는 16개쯤 챙겨 넣은 듯. 체감무게 10킬로그램쯤 되는 기저귀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둘러 매고 기내용 캐리어에 둘째를 태운다. 지시수행이 최근 제법 잘 되는 아들에게 동생이 탄 캐리어를 끌고 직진하라고 알려주면, 그럴듯하게 잘해준다. "맞아 맞아. 오, 너무 잘했어!" 좋았어. 이 정도면 혼자 애둘 끌고 비행기 탈 만 하지!
'아이랑 장거리 비행', '아이랑 비행기 타기' 류의 키워드를 초록 검색창에 치면 나름의 노하우가 켜켜이 담긴 포스트가 제법 많이 뜬다. 하지만 넘사벽 비행 레벨로 따질 때 내가 빠지면 섭섭하지. (1) 영유아 애 둘 데리고 + (2) 엄마 혼자서 + (3) 인천에서 미국 동부까지 14시간 남짓 (심지어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꼬박 16시간이 걸린다). 이뿐만인가! 아이 둘이랑 움직이려면 23kg 상당의 수하물 캐리어 꽉꽉 채워서 자그마치 5개는 부쳐야 성이 찬다. 아이들 한국에서 먹던 간식 찾을까 봐 일주일치는 데려가줘야 안심되고, 현지 날씨가 도대체 어떨지 전해 들어도 체감이 잘 안 돼서 이 옷도, 저 옷도 일단 꾸겨넣는다. 나 혼자라면 "에라이, 가서 대충 날씨 맞춰서 저렴이 사 입어" 하겠는데! 애둘은 또 그게 잘 안 된다. 일명 '이럴까 봐 저럴까 봐' 짐이 많아지는 것.
수하물 캐리어 5개에 기내용 캐리어 1개 이고 지고... 자, 여기에다가 또 한 가지 어나더레벨을 추가해 보면? 나는 '신경다양성' 아들과 함께 비행기를 탄다. 아이를 데리고 이렇게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를 혼자 탄 게 벌써 7회 차가 되었다. 그 사이, 한 명만 케어하던 육아 레벨이 '애둘 육아력'으로 진화했고 첫째는 조금 더 '특별해졌다'.
나는 신경다양성 아들과 함께
비행기를 탄다
벌써 7회차가 되었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와 비행기를 타는 건, 정말이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통상적으로 만 4세와 만 2세 아이들의 장난기 그득그득, 왁자지껄함을 상상만 해도 정신 빠질 것 같지 아니한가. 발화가 거의 없던 아들은 제법 말도 의사 표현도 잘하는 한국 나이 여섯 살 오빠가 되었고, 작은 소리에도 너무나 예민하게 반응했던 시절을 지나와 일반적인 외출에 잘 협조하는 편이다.
그래도 예측지 못할 '변수'가 많다.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워가는 일은 그렇다. 누군가에게 명명백백 선언하기 전에는, 겉으로 표가 잘 나지 않을진대, 아이는 자기만의 루틴이 확고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에 취약하다. 새로운 맥락을 알아가기까지는 수없이 많이 연습해야 한다. 어쩌다 한 번씩 타는 비행기, 간헐적으로 마주하는 공항의 상황은 그래서 '변수'가 많을 수밖에. 의도적으로 자주 훈련해 보는 상황과 맥락이 아니라면 아이도, 엄마도 그래서 긴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울 상황을 미리 피하지는 않는 편. 생각만 해도 진땀 흐르는 상황이라고 해서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접어가며 살지는 않는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이랑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고고! 하고, 남매 둘 데리고 같이 하고 싶은 일이 있대도 더더욱이 씬나게 추진한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아쉽게도 이건 못 하겠네' 내려두는 일이 생기는 걸 지양하고자 ABA (응용행동분석) 전문가가 되기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미국 석사 유학 중, 첫째를 출산했기에 아이의 고향은 미국 보스턴. 잠시 한국에서 친정 부모님 도움을 받으며 두 아이 육아를 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보스턴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과의 시간이 필요했고, 아이들도 아빠와의 긴밀한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가 향후 다니게 될 초등학교에서도 특수교육대상자로 입학하려면 이런저런 평가 절차가 예정돼 있었고, 한국계 미국 의료진과의 스케줄도 운 좋게 잡혀있던 상황. 미국행을 머뭇거리거나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늘 그렇듯이 양가 부모님과 남편은 "혼자서 아이 둘 데리고 장거리 비행이 괜찮겠냐"며 우려를 표해왔지만, 나는 늘 그렇듯이,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쿨하게 대응하고야 만다. "네, 진짜 괜찮아요. 진짜로!"
어쩌다 한 번씩 타는 비행기
간헐적으로 마주하는 공항의 상황은
자폐스펙트럼 아이에게
'변수'가 많을 수밖에
또래들보다 천천히 자라나던 아이는 작년 겨울 대학병원에서 '자폐스펙트럼 (Autism)' 진단을 받았다. 아이 나이 만 4세. 첫째가 20개월 무렵부터 그 순간을 감지해 왔던 나는 코로나 시국 속 일찍이 응용행동분석 (ABA, Applied Behavior Analysis)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약 2년 반의 수련 끝에 ABA 자격증을 2개 취득했다. 발달장애, 자폐스펙트럼 같은 키워드는 내 삶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일상의 당연한 조각이 된 지도 벌써 4년째. 아나운서에서 'ABA치료사'라는 새 직업으로 인생 제2막을 열었고, 'ABA 하는 아나운서'라고 새 별명을 지어 나를 알리기도 했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와 같은 발달장애를 품은 '신경다양성 (Neurodiversity)'을 경쾌하고 즐겁게 소개하고 싶어 에세이도 시작했다.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장애와 비장애 남매가 함께 아쿠아리움에 방문했던 날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공간에서 각기 다른 것에 꽂혀있던 두 살 터울의 남매는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지만 푸르른 수조의 빛깔 안에서 또 같이 어우러지기도 한다. 장애, 비장애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백 개체의 물고기 사이를 뛰어다니는 남매를 바라보며 '신경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둘이 참 예쁘게 어우러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신경다양성 이야기가 핑크핑크하지 않고, 노르스름하지 않고, 아름답고 푸르러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부디 대답이 되셨기를!
전편이 아이가 공식 진단받기 전의 일상과 고민, 생각들을 담았다면 2편은 찐 '발달장애' 어린이와 함께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더불어 이야기 무대는 아이가 태어난 '미국'으로 시선을 옮겼다. 공간이 달라지다 보니 세상의 시선도 많이 달랐고, 그 속에 어우러지는 엄마의 마음도 달라졌다. 더불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의 엄마가 왜 마지막 화에 딸 영우를 그토록 보스턴으로 보내고 싶어 했는지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오, 여기 참 좋다. 이래서 보스턴 보스턴 하나 봐" 공감한 순간도 많았다. 자연스레 한국에서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것과 미국에서 신경다양성 아이와 함께한다는 것을 비교하며 저울질할 일도 제법 있었다. 혼자만의 소박한 저울질이었지만 한국이 확실히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도 냉큼 글로 담아볼 예정이다.
우영우의 엄마가 왜 영우를
그토록 보스턴에 보내고 싶어 했는지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공감한 순간도 많았다
"아, 이래서 보스턴 보스턴 하나 봐"
신경다양성 아이 하나, 말괄량이 수다쟁이 두 살배기 하나 붙들고 장장 14시간 미국행. 애 둘 데리고 장거리 비행은 언제나 그렇듯 만만치 않지만, 또 제법 '해낼 만'한 여정이었다. (= '해볼 만'하다고 말하지 않았음 주의!) 엄마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탑승하면 좌석의 등급 상관없이 '한가족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국적기 덕분에 현지 공항에서도 친절하고 빠른 직원 안내는 덤이었으니! 다행히도 '탈 것'에 푹 빠져 있는 나의 신경다양성 아이는 '비행기'가 너무너무 좋아서 익숙하지 않은 낯선 환경에서도 현지 공항직원들의 손을 덥석 잡으며 친화력을 표해줬다. 한 가지에 빠지면 몰입력만큼은 대단히도 천재적인 아들이니, 비행기가 장거리든, 좌석이 이코노미든, 그냥 무조건 다 좋아라 했던 탐승 덕후력만큼은 다행이었다고 해야 하나!
슬쩍 보면 깨방정 발랄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부끄럼이 많아 보이는 아이. 남자아이들이 여아들보다 언어가 조금 느린 편이라고 하나, 또래들보다는 2년 정도 느려서 두 살 터울 동생과 비슷한 속도로 자라나는 아이. 같은 나이 친구들에 비해서 많이 느리고 때때로 맥락에 안 맞는 혼잣말을 하거나 폴짝폴짝 점프를, 빙그르르 회전을 하며 까르르르 웃는 내 아이. 사진빨은 또 너무 잘 받아서 "나중에 아이돌 해야 하는 거 아냐?" 우스갯소리하며 머리를 쓰다듬게 되는 새하얗고 고운 내 아이. 장애와 비장애 남매, 신경다양성 아들 와 신경다양성 오빠를 보드랍게 품는 딸을 함께 키워가는 이야기,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 (총16화)
* 2화 다름과 특별함, 독특함과 이상함 사이
* 3화 사과주의보, 촘촘히 사과하는 하루
* 4화 "내가 베토벤을 낳았나봐"
* 5화 흑백인간, "입력값이 잘못됐습니다"
* 6화 들어는 봤니? 키즈카페 메뉴판
* 7화 '구운몽' 별명 속 숨은 비밀
* 8화 자폐 아이에게 가장 힘든 '이것'
* 9화 두 살 터울인데 쌍둥이를 키웁니다
* 10화 [포토에세이] 신경다양성 세계, 문 두드리는 방법 (1)
* 11화 [포토에세이] 신경다양성 세계, 문 두드리는 방법 (2)
* 12화 디즈니가 '자폐'를 그린다면
* 13화 "딩동댕 유치원에 입학할게요"
* 14화 선 넘는 플러팅, 혹은 나쁜 남자
* 15화 웰컴 신경다양성존을 찾습니다
* 16화 내가 그리는 '뉴로 다이버시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