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워나감에 있어 난관이 되는 오르막이 크게 3가지 있다고들 한다. 하나는 아이가 병원으로부터 '진단'이라는 걸 받을 때. 또 하나는 아이가 그 공포의 '사춘기'를 맞이할 때쯤. 마지막 하나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라고들 한다. 물론 아이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 개인차가 있겠으나, 세 가지 오르막이야말로 내 아이가 '신경다양성인지, 아닌지' 여부와 관계없이 육아에서 몸도 마음도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구간임은 분명하다. 미국에 와서 가장 부담스러웠던 일정이라면? 뼛속까지 한국 엄마라고 자부하는 내가 아이의 '첫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아아, 내게도 진짜 '학부모'가 되는 날이 찾아오다니. 그것도 낯선 땅, 미국에서.
미국 육아 토할 것 같아
한국이 아기 키우기 최고라니까
결혼 후 미국에서 석사 유학을 시작하기 직전 찾아온 첫째. 유학생활과 동시에 임신 출산 육아를 나란히 경험하느라, 자연스레 보스턴 출신이 된 첫째. 남편의 직장이 보스턴, 아이의 출생지가 보스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 순간 '한국 육아'에 대한 미련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 초기 육아를 경험한 지라 '한국육아'는 대단히 편한 것이었고, '미국육아'는 마냥 험난하고 힘든 것으로만 느껴졌다. 소아과 한 번을 가려해도 예약 잡는 데 오래 걸리고, 아이의 발달전문가와 만날 약속을 잡으려 해도 수개월이 걸렸으며, 흔히들 경험하는 백화점 문센의 영유아 클래스 따위를 경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에게 미국은 한동안 '너무 힘든 타지'에 불과했다. "아니 왜 그 좋은 나라를 두고 한국 육아를 희망하냐"고 지인들마저 핀잔을 줬지만 그럴 때마다 "미국육아 토할 것 같다"고 "한국이 아기 키우기 최고"라고 정색하며 받아치곤 했다.
미국에서는 적어도
'친구'를 만들어주더라니까
코시국이 끝나고 온 세계가 코로나 없던 시절로 차츰 돌아가고 있을 무렵, 또다시 치열한 고민이 시작됐다. 다시금 한국 육아냐, 미국 육아냐,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음표를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조기 유학에 대한 로망이 있거나, 아이를 이미 한국에서도 국제학교를 보내고 있다면 '아이를 미국에서 키워가는' 옵션은 참 판타스틱 할진대, 보스턴에 찐 우리집을 마련해 두고도 여전히 '한국'에서 아이 키우는 게 편할 거라고,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해 두던 나. 그랬던 날들 속, 우연히 이어진 지인과의 대화 한 토막이 내 마음속에 자꾸 꽂혔다. "한국도 장단점이 있고, 미국도 장단점이 있겠지. 그런데 미국에서 발달장애 아이 키우던 내 지인이 그러더라고. 미국에서는 적어도 아이 곁에 '친구'를 만들어 준다고."
친구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 아니야? 하실 수도 있겠지만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워가는 엄마의 마음은 좀 더 특별하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함'이 주된 특징 중 하나인 자폐스펙트럼 아이의 경우, 또래와의 어울림을 자연스럽게 기대하기는 어려우니까. 더더욱이 상대적으로 남의 눈치를 살뜰히 살피게 되는 한국 일상 속에서는 아무래도 또래 부모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조금 남다른 우리 애랑 어울리는 거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기 마련. 우리 애 '독특하다고' 친구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어쩌나 또 걱정된다. 한국에서는 이토록 걱정이 많은데, 미국에선 친구를 만들어준단다. 그간의 고민과 한숨이 '탁' 터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뭐가 되었든, 우리 애를 '진짜' 도와주려 애쓴다는 뉘앙스가 참 반가웠다.
엄마 학교 갈래요
스쿨버스 타고 학교 가자
이제 막 만 5세를 넘겼지만, 입학을 앞두고 있는 학교에 특수교육 대상자로 선정되려면 수개월 전 미리 이런저런 발달 평가를 받아야 했다. 한국에선 어린이집 다녔는데, 벌써 미국에서 초등학교 진입을 앞두고 있다니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학교 가기 싫다고 하면 어쩌나, 얘는 한국어가 편한데 영어만 쓰는 선생님들이 답답해서 텐트럼 터지면 어쩌나, 얘가 낯선 환경에서 나랑 안 떨어지려고 하는데 평가하러 들어갈 때 나랑 절대 안 떨어진다고 우기면 어쩌나, 몇 번의 학교 스케줄을 앞두고 '어쩌나' 병에 걸려버린 애미.
그런데, '어쩌나 어쩌나' 수없이 반복해 대던 엄마 보란 듯이 애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금발머리 선생님 손을 덥석 잡고 "빠빠이" 하고 들어가 버렸다. "얘 괜찮았나요? 저 안 찾았나요" 물어보니 너무 괜찮았다고, 제이크가 영어단어도 이미 많이 알고 있어서 놀라웠단다. 네네... 암요, 엘리베이터, 트럭, 카, 버스... 이런 것도 다 외래어니까요. 아주 작은 포인트마저 칭찬에 감탄에 감동의 제스처까지 얹어주는 선생님들 최고.
여기에 아이는 학교 한번 다녀와보더니 매일 "스쿨버스 타고 학교 가자"라고 진심 졸라댔다. 아이도 학교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쁨 받고 있구나' 감지했던 거다. 작은 한국말 한마디에서 영어단어를 캐치해 내고, 한국말로 맥락 없이 말해도 본인들이 통역기 돌려가며 한국어마저 이해하려 애쓰며 소통의 재미를 선물했다. 발달이 느린 아이고, 상호작용 패턴이 독특한 아이고, 때때로 사회적 눈치가 없어 보이지만 이런 건 참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학교에서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그 감정은 아이가 미국 초등학교를 절로 향하게 만들었다.
미국 초등학교 첫 방문 이후, 우리는 종종 학교에 들렀다. 스케줄이 잡혀있지 않은 날도 그냥 자전거를 타고 학교 주변을 구경 갔다. 아이가 학교의 기운이 마음에 들었구나 싶어서 한 번은 학교 뒤편 놀이터에 가서 미끄럼틀만 실컷 타보고 오고, 한 번은 동생까지 단단히 손을 잡고 조깅 겸사겸사 빙 둘러 뛰어갔다 왔다. '진짜로 다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이는 학교를 참 좋아했다.
"미국에서는 친구를 만들어주더라"는 지인의 말이 마음속에서 동동 떠다녔던 날들이었다. 친구를 1명 만들어 줬네, 2명 만들어 줬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말은 곧, 아이에게 '다정함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기도 했다. 천천히 자라는 아이라 '예외', '열외'가 되지 않고 함께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주는 곳. 조금 달라도 '잘한다'고 너그러이 엄지척 해 줄 수 있는 곳. 아이가 사랑받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되니 그제야 마음이 따사로워졌다. 실제로 미국 초등학교에 첫 방문한 날이 3월 초엽이었는데, 말 그대로 학교 유리창에 비친 햇살은 '봄날의 햇살'이었다. 부드럽고 포근했다.
미국 초등학교 다니면
영어실력은 자동 탑재되겠지
미국에서 유년시절 보내는 거
왠지 로망이잖아
신경다양성 아이를 미국에서 키우는 마음은 조금 다르다. 물론 그 언젠가, 천천히,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아이로 자라날 수 있겠지만, 언어보다 더 중요한 건 이런 류의 것들이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 뚜렷한 학습 활동은 늦어지더라도 단 한 명의 또래와 눈 맞추고 까르르 웃을 수 있는 여유. 알아들을 수 있든, 그렇지 않든, 선생님의 다정한 인사. 두어 번의 토닥거림. 어서 오라고 오늘도 학교 와서 너무 반갑다는 따스한 포옹.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억지스럽지 않게, 이미 펼쳐지고 있는 일들이었다. 낯선 땅, 낯선 학교인데도 아이가 "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딴 데 있지 않았다. 신경다양성 내 아이의 강점이자 약점은 '거짓말이나 농담을 못한다’는 건데 학교 가자고 졸라대는 건 정말이지 찐 진심이었다.
영화 <원더>에서 안면장애가 있는 주인공 '어기'는 기나긴 홈스쿨링을 끝내고 학교에 등교하기로 결심한다. 학교의 교장이었던 '투쉬먼' 선생님은 세 명의 친구를 불러 '어기의 친구'가 되어 도와줄 수 있게끔 판을 짠다. 그 중 얄미운 녀석도 있었고, 탐탁지 않아하면서도 어찌어찌 말을 건네는 인형같은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 측에 의해 계획된 우정이 아니더래도 어기 주변에는 친구가 자꾸자꾸 늘어간다. 특이해서 피할 법 하지만 결국에는 어기의 장점과 매력을 찾아내며 '재밌는 날들'을 고이고이 만들어 가는 아이들이 참 예뻤다. 심지어 한 학기의 마지막을 찍는 날, 어기는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성장해나간 공을 인정받아 상도 받는다.
내 아이도 '많이 독특하지만', 사랑받은 공간 속에서는 뭐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아들이 대단한 자동차 박사라고 감탄할테고, 어떤 또래는 잘 웃는 내 아이의 웃음 소리가 호탕하다고 박수쳐주겠지. 학교가 만들어주는 '친구'든, 계획 속에 없던 '친구'든, 신경다양성 아이에게 진짜 친구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다 설렜던 건 안 비밀. 아들이 누구라도 집에 데려오는 날이 생긴다면 맛있는 케이푸드 하나쯤은 당당하게 내놓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요리에 취약한 엄마지만 김밥이나 불고기쯤을 연습해둬야겠다고 잔잔히 결심했던 날. 미국 초등학교에 다녀온 날, 나는 종종 상상의 나래를 폈고 요리 유튜브도 켰다.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