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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ism Welcoming 자폐 프렌들리를 아시나요

[21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by 마이 엘리뷰

육아인생 6년 차.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주 찾게 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키즈프렌들리 (KId-friendly)'. 주말에 아이랑 가기 좋은 실내 놀이터를 검색하고 아이를 데리고 한 공간의 다른 고객들이 불편해하지 않을 만한 공간을 사전 탐색한다. 재잘재잘 떠들기 좋아하는 아이가 방문했다가 괜히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해치면 어쩌나? 한창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아이들인데 박물관이나 미술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관리자가 불쾌해할 만한 '선 넘는 행동'이라도 할까 봐 미리 안전지대를 찾는 거다. "이곳은 웰컴키즈존입니다" 쓰여있으면 반갑고 '노 키즈 존 (NO KIDS ZONE)' 아니라 '예스 키즈 존 (YES KIDS ZONE)'이라는 푯말에 가슴을 한껏 쓸어내리게 되는 루틴이 당연해졌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액튼(Acton)에 위치한 '디스커버리 뮤지엄'


아이들의 방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공간. 아이들의 눈치 없는 깔깔거림에 냉정하게 눈치 주지 않는 공간. 키즈프렌들리 존은 최근 자주 눈에 띄는 편이다. '키즈프렌들리'를 내세운 호텔 마케팅도 보이고, 입구부터 아기의자를 잔뜩 쌓아두고 점심시간대 엄마와 아기고객을 겨냥하는 '키즈프렌들리' 식당도 제법 많아졌다. 아이 둘 키우는 엄마아빠의 입장에서 이런 공간은 작든 크든, 비싸든 저렴하든, 일단 기분 좋게 입장하는 동력이 된다. 아이를 키워가는 시기가 한 사람의 생애주기에서 정말이지 고귀한 타임라인이라는데 옆 자리 사람들 너무 시끄러울까 봐, 우리 애들이 너무 부산스러워서 분위기 망칠까 봐 마음이 쪼그라드는 건 참 슬픈 일이니까 되도록 아이동반 고객을 환영해 주는 곳으로 향하는 것.


세상에! 이것도 가능해?
오티즘 프렌들리 구역이라니


키즈프렌들리 존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엄마의 삶 6년 차, 미국에서 더 놀라운 존을 만났다. 이름하여 '오티즘 웰커밍' (Autism Welcoming). 좀더 쉽게 번역하자면 '자폐 친화구역'이었다. 자폐스펙트럼 장애로 진단받은 아이들도 걱정 없이 와서 놀다 가라는 그야말로 '환영'의 문구. 보스턴 근교, 액튼에 위치한 <디스커버리 박물관 (Discovery Museum)>에 수개월 만에 방문했던 날 이 반가운 표식과 마주쳤다. 매사추세츠에 거주하는 아이 있는 집이라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어린이 박물관, 학교에서도 현장학습지로 자주 선정되는 이곳 박물관이 ‘오티즘 웰커밍’이었다니! '키즈-프렌들리'를 뛰어넘어 '자폐-프렌들리'가 존재한다는 놀라움에 정말이지 입이 떡 벌어졌다. 오오! 이게 가능해? 이거 진짜야?


'

자폐 프렌들리 존이 꼭 필요할까! 누군가에겐 고개가 갸웃거려질 만도 하다. 나 역시 자폐스펙트럼이 참 '남의 일'이라고만 느껴던 적이 있으니까.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워보기 전에는 #장애아, #발달장애, #자폐스펙트럼이라는 키워드는 단어의 첫 음가부터가 완벽하게 남의 것이었으니 너무나 이해한다. 하지만 국가정신건강포털에 따르면 국내에서의 대규모 전수조사 결과, 자폐스펙트럼의 유병률은 2.64%라 한다. 나라에 따라, 조사방법에 따라 세세한 수치는 달라지겠으나, 100명 중 한 두 명 정도가 오티즘 친구라고 얼핏 생각해봐도, 두 학급 걸러 1명 정도는 신경다양성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주 적지만은 않은 숫자다.


그럼에도 얼마 되지도 않을 소수의 신경다양성 아이들을 위해 이런 구역까지 굳이 만들어야 할 지 의문을 품는다면 나는 그저 조용히 끄덕끄덕. 실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웃이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주변 구석구석 신경다양성을 품고 있는 1인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래서 Autism Welcoming 문구는 꽁꽁 숨겨져 있는 오티즘을 두 팔 벌려 반겨주는 공간인 동시에, 어서 오라고, 일단 와보라고 적극적으로 손 내밀어주는 것 같아서 더 다정했다.


미국에서 만난 자폐 프렌들리 구역. Autism Welcoming을 Discover 해버린 디스커버리 뮤지엄을 향한 발걸음


그렇다면 어째서 왜 여기가 '오티즘 웰커밍 ; 자폐 프렌들리'으로 인증받았을까? 그 물음표는 아이랑 30분 정도 머물다 보니 자연스레 풀렸다. 자폐스펙트럼 성향이 있거나 진단받았을 경우, 아이들 각각 다양한 양상과 징후를 보이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이 감각처리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소리에 과도하게 예민하거나 정반대로 음성 음향 정보에 유난히 심취해있기도 한다. 조명의 미세한 떨림이나 빛의 반사에 빠져들어 흥분하기도 하고 시청각 감각을 과하게 추구하느라 바로 옆 사람과의 상호작용은 우선순위가 저 뒤로 밀려버리는 상황이 흔하다. 이른바 '감각추구'를 한다고들 표현하는데, 디스커버리 뮤지엄은 그 예민하고도 특별한 감각추구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세션이 참 다양했다.



아이가 이 공간에서 맨 처음 매료됐던 건 손으로 핸들을 무한 돌려 공을 뱅글뱅글 상승시킨 뒤 아래로 다시 또르르 떨어지게 만드는 기구. 가뜩이나 동그란 물체 뱅글뱅글 돌리는 걸 무한 반복했던 게 아기 시절의 감각 추구였는데, 여기선 신경다양성 아이가 좋아할 법한 놀이를 구현하되, 조금 더 과학적인 상승 - 하강 놀이를 덧대었다. 또 다른 친구들과 그 감각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공동 놀이공간을 충분히 마련해 놨다. 의미 없는 감각추구만 계속 반복하라고 판 깔아준 게 아니라, 아이가 좋아하는 감각을 존중하되, 거기에 또래와의 상호작용할 수 있는 구성도 넣어두고 학습적인 요소까지 추가해 준 거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아이가 신나서 방방 뜨다가도 뮤지엄이 의도한 대로 마치 과학자처럼 때론 집중하고 신중해지는 걸 보니 '오티즘 프렌들리' 딱지가 괜히 붙은 건 아니구나! 만족스러웠다.


미끌미끌한 양말 스케이트장도 마찬가지였다. 신경다양성 첫째도, 그런 신경다양성 오빠를 제법 끌고 다니며 리드할 줄 아는 둘째도 덩실덩실 춤을 추던 공간. 미끄덩한 바닥 위에서 엉덩방아를 자꾸 찧어대도 서로 썰매를 끌어내고 스케이팅 흉내를 내며 깔깔댄다. 한 아이는 평소와 다른 바닥 감각이 신기하고 좋아서 신났고, 한 아이는 바닥에 드러누워 부비부비하는 아이가 웃겨서 또 좋단다.


뭐 때문에 좋든, 1분 1초 쉬지 않고 웃어대니 이보다 더 건강한 감각추구가 어디 있겠나! 신경다양성 아이라고 해서, 특수교육대상자라고 해서 따로 특별한 공간을 떼어내 마련하고 꾸며 둬야 하는 게 아니다. 신경다양성 아이도, 그렇지 않은 아이도 같이 어우러져 시원스럽게 웃을 수 있는 '함께의 공간'이 진짜 '자폐 프렌들리 구역'이다. 명색이 오티즘 웰커밍인데 오티즘 친구만 있으면 안 되는 거니까. 웰컴 해주는 다른 사람들도 있어야 하는 거니까.


보스턴의 다양한 뮤지엄 중에서도 ‘오티즘 웰커밍’ 존이 마음에 들어 너무 자주 간 결과, 디스커버리 뮤지엄에서 반나절 보내는 우리만의 놀이 순서, 나름의 행동루틴도 생겨났다. 꼭 마무리는 물놀이 존에서 마무리해줘야 건강한 감각추구의 완성! 물이 졸졸 흐르는 틈 속에서 빼곡하게 레고조각을 줄 세우는 아들은 시원한 물 촉감 속에서 정렬하는 맛을 좋아했고, 마련돼 있는 방수 앞치마를 껴입어도 바짓단 끝이 축축하게 젖어버리도록 '참방참방' 물 튀는 맛에 기뻐했다. (물건 정렬하는 것도 좋아하는 데 거기에다 물 감각까지 맘껏 느끼니 금상첨화지 뭐.)


물 튀는 감각에 너무 흠뻑 빠져서 옆 친구나 이웃 엄마가 작은 물폭탄을 맞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어느 하나 찌푸리는 사람이 없어 내가 다 편안했다. 미국은 어딜 가나 '키즈 프렌들리' 해서 신기했는데, 여긴 '오티즘 환영구역'의 면모까지 얹었으니 '아이가 오늘 혹여 사고 치면 어떡하나' 우려를 차곡차곡 접어둬도 결코 꺼낼 일이 없었다. 이런 뮤지엄은 정말이지 최고. 연간권 아니라 평생권이라도 끊을래요.


오티즘 웰커밍인데
오티즘 친구만 있으면 안 되는 거니까
웰컴 해주는
다른 사람들도 있어야 하는 거니까


디스커버리 뮤지엄을 자주 들락거리던 어느 날, 전혀 다른 공간에서 또 하나의 'Autism Welcoming'을 만났다. 한국에도 체인점이 있는 피자 레스토랑 앞에 더 큼지막하게 세워진 입간판. 이 피자 레스토랑도 역시 '오티즘 웰커밍'이란다. 브랜드 전체가 해당되는 건 아니고 레스토랑이 위치해 있던 내틱 몰에 유독 오티즘 웰커밍 스토어로 지정된 곳이 많은 것 같았다. 직원에게 문의하면 자폐스펙트럼에 해당되는 사람과 동반 가족구성원을 위해 추가적인 서비스를 해준단다.


Ask a team member how we can help!
Our business is part of an Autism Welcoming community.
We take extra steps to support people with autism and their families

우리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직원에게 문의하세요. 우리는 '오티즘 웰커밍' (자폐 프렌들리 구역)의 일원입니다. 자폐가 있는 사람과 가족들을 위해 추가적인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배가 고파서 익숙한 체인점에 들어가려던 심산이었는데 이걸 보니 여태껏 흔하고 평범한 체인 레스토랑이라고만 여겨왔던 이곳이 지상최대의 맛집처럼 보이던 걸! 아이 데리고 외식하기란 늘 모험이자 도전이지만, 이날 따라 더 안심하고 입장했던 것도 이 표지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날 유독 아이 둘 다 얌전했고 키즈프렌들리 나라답게 예외 없이 쥐어주는 아동용 컬러링 키트만으로도 남매를 케어하기가 충분해서 굳이 '우리가족, 오티즘 패밀리'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먹는 내내 과연 저 'Extra Steps' (오티즘을 위한 추가적인 조치)는 무엇일지 궁금했던 바, ‘지금이라도 말해볼까? 말하면 음식이라도 더 주는 걸까?’ 호기심이 발동한 애미였던 거 안 비밀. 혹시 "추가 할인이라도 해주는 거 아니냐"며 남편과 수다 떨다가 결국 "아까 한번 말해볼 걸 그랬다"고 무릎을 치고 말았던 늦은 오후 되시겠다.


피자레스토랑에 다녀온 뒤 찾은 정보. 신경다양성 아이에게 소셜스토리 (Social Story, 맥락을 이해해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게 돕는 맞춤형 이야기), 진정키트도 제공한단다



어린이 박물관에서 한 곳,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잣집에서 한 곳. 미국에서 마주했던 '자폐 프렌들리 존'은 문구가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소중했고 반가웠고 놀라웠다. 물론 그 표지가 있다고 해서 아이가 눈에 보이는 또렷한 혜택을 받거나 굿즈라도 얹어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입장료가 할인되거나 음식 메뉴에 할인가가 적용되는 것도 더더욱이 아니고 말고. 그럼에도 굳이 정문 한가운데 스티커를 붙여두고 음식점 대기라인 앞에 커다란 입간판을 내어두는 그 마음씀씀이, 너무 다정하지 않은가! '아이가 특이한데 왜 데리고 나왔대?', '애도 감각처리가 미숙한데 그냥 집에 있는 게 낫지 않나!' 쑥덕거리는 시선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아니, 여긴 원래부터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곳에는 그저 '어서 오라고' 내흔드는 따뜻한 손짓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Autism Welcoming 반갑다고 잔뜩 시킨 건 아니었습니다만


앞으로 또 다른 만남들이 기다려진다. 세 번째 Autism Welcoming 은 과연 어디에서 찾게 될까? 이번에도 음식점이라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할인되나요? 애플주스라도 한 잔 더 주실까요?" 따위의 촌스러운 질문은 살짝 넣어두기로 스스로 약속!) 혹시 또 다른 박물관이라면 자폐 아이가 더 재밌게 할 수 있는 추천 프로그램이나 시설이 있을지, 질문도 아낌없이 해봐야겠다. 아직은 미국이라는 타지의 영역 안에서만 마주했던 특별한 표식이었지만, 곧 좀 더 넓은 영역에서 마주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그게 한국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눈물 겹고 반갑겠고.


'오티즘 웰커밍' 웹사이트 (https://autismwelcoming.org/) 소개 캡처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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