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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게 자폐를 고백할 때 생기는 일

[22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by 마이 엘리뷰

한국에서 자폐스펙트럼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곤란한 순간은 언제일까? 바로 '아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다. 한정된 평수의 공간에 아이를 데리고 타면 우리 아이의 독특함이 금방 티가 난다. 상대편 어른이 방긋 웃으며 "몇 살이야?" 물어도 묵묵부답. 대신 "문이 열립니다",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 기계음을 아주 실감 나게 따라 하는 아이. 문이 열리는 층마다 불현듯 내렸다가 다시 냉큼 올라타는 아이. '장난기가 좀 심한 아이네?'라고 반응해 주기에는 쬐끔 더 이상한 구석이 있다. 촉이 빠른 이웃들은 아마도 '발달장애인가 보군' 눈치챌 법하게 아이가 자라나 버렸다.



사실 아기아기 시절엔 또렷하게 '티'가 잘 나진 않았다. 왜냐면 발화량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말이 없으니 “부끄러움이 많은가 보다” 했고, 자기 손에 들린 자동차 따위의 장난감에 관심이 꽂혀 있으니 “원래 그 나이 때 남자아이들이 차를 좋아한다”며 끄덕끄덕 이해하는 이웃들이 대다수였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아이는 조금씩 범상치 않은 '티가 나기' 시작했다. 양팔 벌려 콩콩 점프하기, 한 톤 올라간 플랫톤의 가녀린 목소리, 키가 또래들보다 껑충 큰 것에 비해 어색하게 천천히 구사하는 한국어 문장 조합. 나는 사실 너무 익숙한데, 그 광경이 낯선 이웃들은 왠지 표정이 살짝 굳어가는 것 같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자꾸 눈치를 살피게 된다.


아이들 등하원 시간대가 닮았다 보니 마주치는 또래 엄마들은 하필 자꾸자꾸 만난다. 만날 때마다 왠지 '그런 아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자신의 아이를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기도 하고, 아이를 제지하는 나를 아래위로 슬쩍 훑는 시선도 느낀다. 어떤 눈빛은 성가시다는 서술어가 담겼고, 또 어떤 눈빛은 안쓰럽다는 느낌도 담겨있다. 어느 쪽이든 내 마음은 텁텁해지고 그날의 육아력도 바람 빠진 탱탱볼처럼 쭈그러들 수밖에. 나 역시 표정관리가 잘 안되는 건 뭐람. "이왕이면 오늘 엘리베이터에 제발 아무도 안 타게 해 주세요" 기원하게 된다.



반면 아이의 신경다양성을 너무 적극적으로 걱정해 주는 공감해 주는 이웃도 있다. 그 다정함이 너무 고마우면서도 때때로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아이가 '오티즘 (Autism)'이라고, '발달이 느린 아이'라고, 그걸 '신경다양성 (Neurodiversity)'이라고도 한다고 말할 때, 살짝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응원해 주는데, 왜인지 '아 괜히 말해서 분위기를 다운시켰나?' 죄책감이 들 때가 있으므로 때때로 나의 고백을 후회한다. 저는 진짜 괜찮아서 말한 거거든요… 때아닌 고백을 들은 이웃 혹은 지인이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 괜스레 너무 미안해진다.


발달 화제를 꺼내지 않았으면 대화가 처지지 않았을 터인데, 내가 지나친 개인사를 밝혀서 대화의 선을 넘었나 반성도 한다. '다음부터 굳이 말하진 말아야겠다'라고 마음의 문을 꽁꽁 잠글 때도 있더랬다.


살짝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응원해 주는데
휴, 괜히 말해서 분위기 다운시켰나?

때때로 나의 고백을 후회했다
대화의 선을 넘었나 반성도 했다.



"아, 저쪽 맞은편 사는 집 아이도 오티즘이야"

"이 동네 신경다양성 아이들 위한 좋은 프로그램이 많은데 여기 사니 너무 잘됐네"


같은 화제의 대화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건 역시 미국에서였다. 아이가 정식 진단을 받기 전, 우리 옆집 아저씨랑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첫째가 발달이 느리고 어쩌면 신경다양성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별거 아니란 식으로 대응했다. (눈은 떨리는데 '별거 아니란 식'으로 연기한 게 아니라, 진짜로 별거 아니게 반응해서 우리가 당황) 오히려 남편의 목소리 톤이 조금 무거웠던지, “전혀 심각할 필요없다”고 도와줄 부분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며 쿨한 향기 폴폴 흘리고 사라지셨다는 이야기.



와아, 난 그 '별거 아니란 식'의 대응이 너무 놀라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한국에서는 아이를 피하거나, 혹은 나를 애틋하게 쓰다듬어주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신경다양성 아이와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엄빠들에겐 사실 F스러운 위로가 절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걱정과 고민의 산을 넘은 지는 오래되었고, 독특하지만 사랑스럽고, 센 텐트럼이 터질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귀여울 때가 있는 아이랑 살아가는데 이미 익숙해져 버린 걸. 오히려 가족은 괜찮은데 식구들 울타리 밖의 누군가가 과하게 아이를 싫어하는 내색 하거나 과하게 아이를 걱정하면 어느 쪽이든 그 '과함'에 기가 눌린다. 그래서 "오티즘? 그게 뭐라고" 받아치며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반응이 반갑다. 무덤덤한 척이 아니라 진짜 아무렇지 않게 덤덤한 게 핵심.


남편이 박사 시절의 지도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 예상했겠지만, 교수님도 역시 그런 건 '별거 아니었다'. "아 그래? 그렇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주변 아는 집 아이도 오티즘이었는데 지금 대학교도 너무 잘 다니고 있어" 굳이 나라 대 나라로 비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한국에선 '걱정'을 전제한 상담이 이어지는데, 미국에선 '미래'를 겨냥한 수다가 이어진다. 아이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뭐가 있고, 신경다양성 부모들이 한 자리에서 모이는 모임도 소개해준단다. 무덤덤히 반응해 주면서도 반갑게 이런저런 소개로 수다에 수다를 이어가는, 지인 소개로 인맥까지 넓혀주는 신선한 이웃들. 아이가 신경다양성이라고 고백했을 뿐인데 반색을 한다. 뭐야, 여기 너무 신기한 동네야 진짜.


아이의 유별남을 가볍게 넘겨주는 쿨한 동네


물론 미국이라고 다 같은 미국은 아닐 것이고, 지역 차도 있을 거고 당연히 개인 차도 있을 거다. 내가 만난 이웃들 특유의 무덤덤함과 반색은 나의 ‘이웃 운’이 좋아서 정말 행운처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르지. 그래도 분명한 건 '신경다양성'에 관한 수다가 줄줄이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것. 적어도 미국에서 신경다양성이나 오티즘에 대한 키워드가 나왔을 때 그 누구와도 잠시 먹먹해지거나 대화에 마가 뜨는 적은 거의 없었다. “여기 인종차별은 있어도 오히려 장애에 대한 차별은 없다”며 누군가 지나가듯이 흘렸던 이야기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도서관에 가서 아이가 신경다양성이라고 말하면, 직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준비된 팸플릿을 건네준다. 놀랍게도 신경다양성 (Neurodiversity) 아이들을 위한 책 소개 리스트를 따로 상시 준비해두고 있다. 아니,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들만을 위한 목록이 아니라, 또래 친구들이 그런 장애 친구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도 한편에 소개해두고 있다. 특별하고 유별난 배려가 아니라, 그냥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경다양성, 발달장애, 자폐 등은 당연히 특수한 것으로 분류되는 사회에 너무 오래 적응해 온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신경다양성 화두를 꺼내는 이들이 오히려 신기했고 때론 얼떨떨했다.


도서관에 비치된, 신경다양성 아이가 주인공이 된 책 리스트


아! 오늘은 제발, 부디,
이 엘리베이터
우리끼리만 타게 해 주세요


아이와 등하원할 때 되도록 이웃과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한국에서 꽤나 간절하게 품어왔던 바람. 지역이 잠시 바뀌었을 뿐인데 이웃과의 만남이 부담스럽지 않은 기적이 일어날 줄이야. 자꾸자꾸 만나서 “우리 애가 요즘 이렇게나 자랐다”고 보여주고 싶고, 인사시키고 싶고, 독특한 행동을 해도 깔깔대며 서로 웃고 수다떨 수 있는 이웃의 존재가 참 반갑다. 이상해보일 수 있는 상동행동이나 맥락에 안 맞는 몇 마디 말에도 함께 쿨하게 대응해 줄 수 있는 사이.


"우리 집에 놀러와서 놀다 가라"고 "우리 집에 애가 좋아할 만한 거 갖다 놨으니 보고가라"고 초대해 주는 마음. 신경다양성을 '특별하게' 봐주지 않는 무덤덤한 사람들이 눈물 나게 반가운 날들이었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워간다는 건 그렇다. 너무 절절히 안타까워하는 F의 이웃보다, 때론 쿨하고 산뜻하며 덤덤한 T의 이웃이 참 좋은 거였다.


아이들과의 동네 산책이 즐거워진 이유. 신경다양성에 과하게 위로하지 않는, 그게 뭐라고, 별거 아니라고, 반응하는 T 이웃이 참 반가워서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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