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둘째를 출산하던 날 방영을 시작했던 드라마 한 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신생아 육아에 밤낮으로 잠못이루며 체력 탈탈 털리던 시절, 핫한 드라마 한 편의 시작은 '반가움' 그 이상이었다. 딸을 낳으려 출산가방을 챙길 때 딱 한 권 고이 집어넣었던 책은 <특별한 아이에서 평범한 아이로>. 자폐스펙트럼 아이를 키워온 캥거루 ABA 대표의 책이 원픽이었을 만큼, 나는 그 당시 26개월 아들의 느린 발달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18개월 무렵부터 우리 아이가 '좀 특별할 수도 있겠다'고 남편과 이야기를 해두었던 만큼, 자폐스펙트럼은 이미 남 얘기가 아닌 듯했다. 자폐 청년 우영우의 스토리는 내 두 번째 출산 호르몬을 타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몰입하게 만들었다.
'자폐스펙트럼 육아'법전을 통째로 달달 외울 정도로 법전 앞에서만큼은 천재적이었던 '자폐 변호사' 우영우. 회전문 앞에서 멈칫해야 하고 포스트잇은 가지런히 줄 맞춰 정렬돼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영우의 열여섯 에피소드 중에 유독 머리가 '반짝' 하게 만든 대사는 다름 아닌 10화에 있었다.
영우 데리고 보스턴으로 가
미국 보스턴에
태산 해외 사무소가 있어
영우의 엄마인 극중 태수미가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청문회에 나아가기 전, 영우의 아빠를 찾아와 했던 이야기. 영우와 준호의 꽁냥꽁냥 러브스토리를 응원하고 있었던 터라, 갑작스레 '미국으로 떠나라' 권하는 친모의 제안은 뜨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찝은 그 공간이 '보스턴'이라는 건 참 반가웠다. '오? 거기 우리 아들 태어난 곳인데!'
보스턴. 결혼 후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남편의 첫 직장이 자리한 곳이며, 나의 미국 유학 도전의 중심이 되었던 한복판. 더불어 유학과 동시에 임신 출산을 멀티플레잉 하느라 자연스레 나의 첫째 아기가 태어난 지역. 코로나 시국의 발발도 미 동부 보스턴에서 맞닦뜨렸으며, 아이의 발달이 예사롭지 않다고 체감한 것도 보스턴에서부터였다. 아이의 발화나 눈 맞춤이 잘 안돼 병원에서 조심스레 '오티즘 (Autism, 자폐)'가능성을 언급했던 것도 보스턴 소재의 소아과였다. 심상치 않은 성장발달 아이를 육아하느라 맘고생, 몸 고생 몰아했던지라 '보스턴'은 내게 때때로 절망의 땅이고 한숨의 영역이었다. 그. 런. 데! 드라마에서는 "영우 데리고 보스턴으로 가"라 한다. 왜 왜? 내가 코시국 육아하느라 죽도록 힘들었던 그 보스턴이 뭐가 특별하길래?
전 세계가 답을 찾는 곳
Where the world comes for answer
올해 초봄, 첫째를 데리고 보스턴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보스턴 어린이 병원 (Boston Children's Hospital)'에 계신 한국계 교수님과 스케줄이 잡혀있었기 때문. 한국에서는 겨울날 이미 일련의 검사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오티즘’ (Autism, 자폐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아뒀지만, 아이가 태어난 미국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미리 현지 의료진에게도 진단을 받아둬야 했던 상황.
첫째가 입학할 학교에서 특수교육 대상자로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학교 내 특수교육 교사진들로부터 언어, 작업, 행동 등에 대한 발달 평가도 미리미리 진행해야 했다. 건너 건너 들었지만 미국에서 특정 분야 전문가 한 명 만나려면 수년을 대기해야 할 만큼 일련의 절차들이 꽉 막힌 고구마 속도라는데 운이 좋게도 2년 대기는 기본이라는 '보스턴 칠드런스'에서 우리가 만나고 싶었던 소아정신과 교수님과 예약이 잡혔다. 한국 타임라인으로는 어린이집 새 학기 시작이었지만, 기관생활에서 편안히 공짜로 누릴 장점을 내려두고 과감히 미국으로 향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전 세계가 답을 찾는 곳. Where the world comes for answer! 보스턴 어린이 병원의 슬로건은 보는 순간부터 심장을 쿵쿵 울렸다. 자폐스펙트럼 장애는 세계적인 권위자를 만나서 외래를 반복한다고 해서 '치료가 가능한 것이 아니며' 어떤 신비한 약물을 복용한다고 해서 관련 증상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찾는다'는 말은 아이에게 편안함을, 부모에게 여유를 선물하는 '치유의 언어'였다. '우리 아이가 자폐라는데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막연하고 두려울 법한 수많은 물음표 앞에 '묵묵히 답을 찾는 공간'임을 내세운 한 문장은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병원의 슬로건을 완벽하게 이해라도 한 듯, 병원 가는 날 아들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3월 초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웠지만 보스턴 어린이 병원 입구를 향해 뜀박질하는 몸짓만큼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첫째가 들뜨니 둘째도 덩실덩실. 때마침 병원 안 텔레비전으로 좋아하는 페파피그 애니메이션까지 틀어주니 애들은 그야말로 신났다. 애들이 좋다 하니 애미애비도 대기실에서 마냥 웃었다. 네 식구 중 누구 하나, '자폐스펙트럼'의 두 번째 진단을 앞두고 긴장하거나 먹먹한 사람이 없었다. 병원이 위치한 브룩라인 (Brookline)을 지나는 철로의 전철을 보며 흥분한 듯 콩콩 뛰었고, 흥이 더 피어나면 깔깔대며 한국에서 배워온 동요를 불러댔다. 너네 병원온 거 맞니? 여기는 심지어 소아정신과학과 행동 이슈를 다루는 꽤 진지한 층이거든! 에라이, 니들이 좋으면 됐다.
미국에서 뵌 한국계 교수님은 미국 육아력 여전히 약한 우리 부부에게 참 다정하셨다. 한국 대학병원에서 첫 진단을 주셨던 교수님도 너무 포근하고 따뜻하셨는데 이쯤 하면 우리 애는 교수님, 선생님 복은 타고 난 듯.
자, 여기에서부터 조금 더 집중! 미국과 한국이 다른 결정적 지점은 바로 '진단' 이후에 있었다. 한국에서는 자폐스펙트럼이라고 진단받은 뒤 부모가 찾아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지만 미국에서는 진단받는 순간부터 의료진과 보조 스태프들, 거주하는 지역의 기관들로부터 적극적인 소통 구애를 받는다. 나 안 그래도 영어로 전화 걸려오면 여전히 얼어붙는데 자꾸 전화 오니까 반갑기보단 솔직히 부담스러웠다고 고백해둔다. 그럼에도 타지에서 이토록 챙겨주는 누군가의 Hello! 는 참 고맙더라.
아이 진단받은 이후에
일상에서 힘든 부분은 없었나요?
자폐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더 필요한 정보가 있나요?
앞으로 어떤 도움을 더 받고 싶나요?
'나 나름 한국에서 ABA치료사로 일해왔다'고 우리 아이 행동 패턴에 대해 나도 이미 잘 이해하고 있고 대처할 수 있다고 배경 정보를 줬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자꾸 컨설팅을 해줬던 사람들. "엄마가 오티즘 행동중재 전문가니까 물론 더 잘 알겠지만" 단서를 내걸면서도, 타지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심리적으로 불편한 일 있으면 알려달라고 한다. “아이가 미국에서 기관을 다녀본 적이 없어 사회성 기술을 훈련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고 하니 수십 분에 걸쳐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고 수십장의 자료를 이메일로 쏘아준다. (아니, 상담은 고마운데 왜 갑자기 나 토플리스닝 하고 있나 현타온 건, 영어에 약한 애미의 기분 탓이겠지)
자꾸 걸려오는 영어 전화가 좀 불편하다고 남편한테 장난스레 볼멘소리를 했더니, 남편이 그러한 내 마음까지 전달한 모양. 엄마인 나랑 전화할 때는 한국 통역사까지 붙여서 삼중 전화를 걸어주는 대륙의 스케일. 한국에서는 치료센터 알아보는 것부터 신경다양성 아이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 멘탈 관리까지 전부 내 몫이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자꾸 그 짐을 나누자고 선을 넘는다. 아니 뭐 이런 적극적인 사람들이 다 있어? 내 아이가 신경다양성이라는데 마치 가족처럼 나서주는 각. 이런 선 넘기는 적극 환영이다.
자폐스펙트럼 아이를 키우는 여정에서 '육아의 주 무대가 어디라면 더 좋을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결혼 전까지 쭉 살아와서 익숙하고 편한 한국이 좋을까? 낯설고 불편하더라도 좀 더 넓은 세상, 아메리칸 드림의 미국이 좋을까?
그 대답은 결국 병원의 슬로건이, 그리고 그 뜻을 품고 살아가는 보스턴 현지 지원군들이 차례차례 쥐어주고 있었다.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워나가는 몫이 단지 엄마 아빠만의 짐이 아니라고, '자폐'라는 자칫 무거워 보일 수 있는 두 글자의 진단도 함께하는 동반자들이 이렇게나 많노라고, 따순 목소리로 손잡아 주던 사람들. 전 세계가 답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내 아이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진단의 날은 한숨과 눈물의 뒤범벅일 거라고 오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어떤 날보다 많이 웃었고 넷의 발걸음도 업텐션 리듬감 속에 동실동실 떠다녔다.
우리의 특별한 햇살, 우영우도 어쩌면 법무법인 '한바다'가 아니라 '태산'의 미국 지사로 건너오는 삶도 꽤 괜찮은 선택 아니었을까. '전 세계가 답을 찾으러오는' 기운을 듬뿍 담은 동네니, 남자친구인 국민 섭섭남과 롱디를 해야 한대도 꽤 그럴듯한 신경다양성 연애가 차곡차곡 내공을 더해갔을 거라고 흐뭇하게 상상을 더해본다.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