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허밍웨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책에는 삶이 깃들어 있다.
아주 시기적절한 때에 내 삶을 대변해 주는 책을 만나는 일이 줄곧 있어왔다.
그 어떤 누구의 위로보다도 큰 힘을 받고는 했던.
오랜 시간 책장에 꽂혀있던 낡은 책들 중 하나를 펼쳐든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거칠고 가혹하게 다가오는 삶이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시기, 허밍웨이 '노인과 바다' 책을 집어 든 것은 그래,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든 날 하고도 나흘.
그러니까 석 달 가까이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하는 늙은 어부가 처음 등장한다.
깡마르고 여윈 데다 두 뺨 아래에는 노인의 상징인 갈색 반점이, 목덜미에는 깊게 파인 주름이.
누가 봐도 힘 빠지고 노쇠한 늙은이일 뿐인 한 어부.
그가 주인공이다.
'늙는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있을까를 생각하는 요즘인데..
그러나 흐르는 세월이란 육신의 힘을 앗아가고 주름지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안에 담긴 삶에 대한 투철한 의식과 의지, 신념의 등불은 끄지 못한다는 것을 첫 장부터 끝까지 분투하며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다.
고기를 잡지 못한 채 지나버린 84일. 고기를 낚는 어부에게 이만큼이나 수치스럽고 창피하며 무력감에 빠져들만한 일이 있을까.
그러나 그는 또다시 조각배를 이끌고는 홀로 바다를 향한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 하나. 들리는 소리라고는 촤아- 촤아- 물결을 타고 바다 위를 저어 가는 뱃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는 바다 새소리와 물 위로 튀어 오르는 크고 작은 고기들의 첨벙거리는 소리.
그는 미끼를 다듬고 깊은 바다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드디어,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크기의 청새치가 노인의 그 미끼에 걸려들어 덥석, 물었다.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고기.
줄에 묶인 고기는 노인의 배를 끌고선 먼바다로 향하고, 그때부터 노인과 고기의 장장 48시간의 사투가 시작된다.
등과 어깨가 패이는 고통,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왼손, 몇 시간도 채 자지 못한 잠으로 어지러워진 머리. 게다가 그는 힘이라곤 다 빠져버린, 늙은 노인.
상대는 거대하고 힘이 센, 맘만 먹는다면 배를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청새치이다.
어느 것 하나 유리한 조건이 없는 그에게, 그러나 단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삶에 대한 의지와 생명력이다.
몇 번이고 줄을 놓아버릴 순간이 있었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청새치를 작살로 찔러 잡아 뱃전에 매는 쾌거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승리의 기쁨도 잠시.
피냄새가 깊은 바다를 타고 들어가 상어가 몰려드는 수로를 만든 것.
한 차례, 두 차례.
한 마리씩, 두 마리씩 노인의 조각배로 소리 없이 다가온다. 뱃전에 묶인 청새치를 공격하는 상어를 향해 노인은 그러나, 처절할 정도의 피나는 싸움으로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청새치의 몸뚱아리를 모조리 다 뜯어먹어버린 상어 떼에 맞설 때에 이미 몸도 정신도 녹초 상태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는 그의 앞에 닥친 모든 시련을 끈질기고도 질긴 의지로 극복해낸다.
그리고는 마침내 마을로 돌아온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거대한 청새치를 뱃전에 묶은 채로.
그 놈들한테 내가 졌어, 마놀린.
놈들한테 내가 완전히 지고 만 거야.
마을로 돌아온 산티아고가 자신을 아끼는 소년 마놀린에게 던진 말이었다.
상어 떼에게 다 빼앗겨 버린, 그래서 중간이 텅 빈 채 코 끝과 꼬리만 남아버린 거대한 청새치를 두고 노인이 던졌던 말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5.5미터가 넘는 거대한 고기와 벌인 이틀간의 사투, 마지막까지도 꺼져가는 정신을 붙들고 상어 떼의 공격에 맞섰던 용기와 투쟁의 의지.
이미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승리' 였다는 것을.
때로는 승리에 버금가는 패배가 있다는 것을.
잠이 든 노인은 그날도 '사자의 꿈'을 꾸고 있다.
바다는 그에게 삶 그 자체였다. 터전임과 동시에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곳.
승리의 기쁨과 함께 개가를 부르며 전리품을 취하게 했던 곳이면서도, 많은 상처와 실패의 흔적들을 남긴 곳.
가만히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잔잔한 조류와 동시에, 성난 것처럼 배를 쥐고 흔드는 거칠은 날씨와 파도가 있는 곳.
맞서 싸워야 하는 가장 고독한 곳이면서도, 삶의 애정이 깊이 담겨 있는 가장 사랑하는 곳.
그러고 보면 어부 산티아고의 바다는 곧, 우리네 삶의 상징이 아닐까.
우리는 때로 우리 의지가 아닌 채, 떠밀려 바다 한가운데 놓인다.
온갖 맞서야 할 것들이 삶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서,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고투해야 하는 곳 한가운데에.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에게 삶이란 멈출 수 없고, 미워할 수 없으며 나아가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토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산티아고에게 바다가 그러했듯.
처음의 질문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삶 자체였던 '바다'에 대한 그의 사랑과 신념, 의지와 생명력에서 찾게 되었다.
그렇다.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삶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념, 의지와 생명력은 우리로 이 삶을, 꿋꿋하게 살게 한다.
매일매일 등과 어깨에 상처를 안고서도, 때로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나의 무기력함을 안고서도.
또 새롭게 솟아오르는 삶의 의지와 용기, 생명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며 이겨내도록 한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나아간다.
각자의 조각배를 저으며 삶의 바다를 향해.
* [하날빛의 글 정원]
글로 이끈 삶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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