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느리고 단순한 것들의 위로

미피의 재발견

by 하날빛



이전에는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것이, 그 안을 깊숙이 파고들어 진가를 알게 되면 선뜻 지나쳐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래고 낡았으나 여전히 빛나는 명작들, 어린 시절 들었던 어른들의 지혜, 돌고 도는 자연의 섭리들이 그러한 것들 중 하나이지요.




딸아이와의 이번 여름 방학, 그렇게 제 마음 깊숙이 다가온 옛 작품을 두 차례 만났습니다.


신기함에 슬쩍 한 번 보았다가 내려놓을 법한 '빛돌'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두고두고 오래도록 간직해야 할, 값을 매길 수 없는 '진주'였던 작품들.




지금까지는 꽃밭에 한 가득 있는 꽃들에게 그저 '아름답다' 흘기듯 말하며 지나가 버린 저였다면.


이번에는 한 걸음 멈춰섭니다.


이 씨앗은 어떻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뙤약볕과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지를 뻗어 하늘을 향해 꽃을 움트웠는지.


뿌리부터 줄기, 하나 하나의 꽃잎까지 세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딸아이를 따라 세세히 헤아려본 작품 중 하나는 [어린 왕자]였고, 또 하나는 전 세계 아이들의 캐릭터 [미피]입니다.


그 중 오늘은 무더위를 뚫고 다녀온 <미피 70주년 전시회>를 남겨봅니다.



어느새 어른.


오늘만큼은 어른의 옷을 훌러덩 벗고 동심을 한껏 느끼자 떠났던 여행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짙은 감동이 되어 돌아온 날의 기록입니다.






간결함의 미학



굵은 선으로 그려진 작은 토끼의 심플한 실루엣. 눈 두개, X자 코 하나면 완성되는 얼굴. 큼지막하고 강렬하게 새겨진 한 두개의 색.


모든 군더더기를 배제시킨 깔끔한 선이 매력인 미피, 세살배기 아기에게 딱 어울리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토끼입니다.






하지만 열 여섯 페이지.

양이 많지 않은 책임에도 이 한 권을 만드는 과정은, 보이는 밑선과는 달리 간결하지 않습니다.


미피 탄생의 주역 딕 브루너는 모든 그림을 자신의 손으로 그리고 오리며 직접 만든다고 합니다. 여느 화가, 작가 못지 않은 인고의 창작 작업이지요.


전시회장 내 그의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스크린이 있습니다. 딸아이가 이 곳 저 곳 예쁜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저는 그 앞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는데요.


영상 속 손 끝 하나하나를 숨을 죽이며 따라가게 될 정도로, 그의 작업은 섬세하고 진지하며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두꺼운 종이에 자국을 내어

연필로 선을 따라 스케치 하고

다시 검은 붓으로 선을 그리고

오려내고 덧대어 컬러를 선택하고

다시 오리고 붙이고.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사실 자세히 보게 되면, 검은 테두리 선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딕 브루너의 '숨쉬는 선' 이라고 한다는데요.

그러고보니 정말로 그의 들숨과 날숨의 긴 호흡이 선 안에서 온전히 전해져오는 듯 합니다.



간결함의 미학으로 불리는 미피는, 사실 그 속의 담긴 수천 번의 지움과 덧댐의 손길을 통해 탄생되었다는 것을 알고나니.



하나의 간결함을 만들기 위해 그가 쏟은 천 번의 손길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가장 절제된, 강렬한 색감




미피, 하면 떠오르는 것을 꼽으라면 눈에 꽉 차게 들어오는 원색의 색감일 것입니다.



선홍색의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갈색. 회색.






많지 않은 색깔들이지만 분명하게 각인되는 강렬함이 있지요.


이것은 딕 브루너가 그 당시 조르주 브라크, 페르낭 레제, 앙리 마티스 등 강렬한 원색미를 추구했던 화가들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색깔을 섞지 않은 원색 그대로를 브루너 컬러로 사용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짐작하건대, 미피를 만날 아이들을 위한 배려이자 감각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딕은 아이들이 또렷한 색깔에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반응한다는 것을 아마도 알고 있었겠지요.




실제로, 색 하나하나에도 진중하게 담긴 그의 철학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단 6가지, 그러나 가장 강렬하면서도 선명한 색의 조합은 아이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기에 충분하고도 완벽한 어울림이 아닐까 합니다. 어른의 마음마저도 완전히 해제해버리는 순수함의 색깔들.



존재만으로도 눈이 부신 아이들을 표현하는 것도 같은 원색의 그림.



이미 다 자라버린 어른도, 어린 날의 나에게로 다시 데려다 주는 듯 합니다.





생략과 여백이 주는, 가능성




'Less is More'


이번 전시회에서 마음을 가장 달구었던 것 중 하나는 미피의 얼굴과 몸짓에 담긴 많은 감정들을 읽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런 웃음끼없이 늘 똑같은 무표정으로 보이지만 딕은 눈의 크기나 거리, 코의 위치 변화를 통해 미묘하게 감정을 표현합니다.







얼굴에서 뿐 아니라, 미피의 몸짓이나 행동 등으로 나타내주기도 하지요.



자신의 감정을 아직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 미피의 감정 표현은 서툴지만 속임이 없습니다.




웃고, 울고, 놀라고, 슬퍼하고, 괴로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면서.








많은 것이 생략된 채 명확한 답을 던져주지 않지만 그림을 보는 각 사람들. 아이들, 어른들 각자의 세계가 느끼는 만큼 상상의 나래를 펼쳐갈 수 있습니다.



슬픔의 크기도, 행복의 양도, 즐거움의 깊이도, 괴로움의 강도도 각자가 느끼는 만큼 이입되는 것이지요.



미피는 생략과 여백을 통해, 보는 이 각자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열어주는 창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생을 미피와 함께 딕 브루너는, 얼마나 다사롭고 천진스러운 마음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그 날을 떠올리며 써내려오다보니 여전히 남아있는 감동의 물결이 잔잔히 일렁이는 듯 합니다.



집에 놓여져 있는 몇 개의 미피 인형들이 그저 한낱 장난감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애정어린 마음으로 한땀 한땀 그어가는 주름진 그의 손길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짙게 남은 여운.

어느 해 여름날, 예상치 않게 불쑥 찾아와 진한 감동의 잔향을 남긴 기억들 때문에요.





어릴 적 미피를 기억하고 계신신 분들이라면, <70주년 기념 전시회>에 다녀와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선물같은 시간이 되실거에요.


어릴 적 동심으로의 회귀와 동시에, 삶에 대한 진중함과 사랑을 다시 한번 내 안에 담게 되는, 그런 소중한 시간 :)





* [하날빛의 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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