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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척하는 겁쟁이 Jun 05. 2023

교사이지만 공무원입니다

최근에 <가짜 노동>(데니스 뇌르마르크 저)이란 책을 접하고 폭풍 공감을 하며 읽어 내려갔다.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한 일들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듯 시원하면서도 한편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은 갑갑한 현실이 떠 올랐다.


나는 초등교사다. 교사의 가장 큰 책무는 아이들이 그 나이에 배워야할 지식과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배우는 것들이란 고작해야 사칙연산이나 기초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으니 초등교육에 대해서는 폄하되기 일쑤다. 하지만 그런 지식적인 부분이 2할이라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경험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배우는 것이 8할쯤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8할인 그 부분을 가르치는 것을 더 어렵고 중하게 여긴다. 교사로서의 보람도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얻어진다.


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교육 공무원이라고도 불린다. 그렇다 나는 공무원이다. 교사로서의 나는 유능하지만 공무원으로서의 나는 무능하다고 느낀다. 교사로서의 삶은 만족스럽지만 공무원으로서의 삶은 불만족스럽다.


오늘도 나는 처리하고 처리해도 매일 수십개씩 쌓이는  <공람함>을 들여다 본다. <공람함>의 제목들을 찬찬히 훑어 보고 있자니 문득 <가짜 노동>이 떠 올랐다. 그다지 아이들에게나 교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홍보, 연수, 보고, 규정, 이벤트 등을 만들어 내고 진행하는데 교육청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하였을까? 또한 이것들을 처리해야 하는 각 학교의 교사 수는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들은 얼마의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3월은 공문 없는 달이라고 해서 각급 교육청에서는 되도록이면 공문을 발송하지 말라고 했단다. 바쁜 신학기에는 학교의 행정업무를  줄여주자는 취지에서 나름 배려를 한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공문을 안 보내는 대신에 교육청 담당자는 <공문게시판>에 공문을 올리고 각 학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걸 확인하고 처리 하라는 것이다. 절차는 더 복잡해진 셈이고 교육청과 학교는 공문을 보낸 것도, 안 받은 것도 아닌게 된 것이다. 웃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공무원 집단은 유독 규정과 절차에 예민하다. 왜냐? 대부분은 감사와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비효율적인 절차라도 규정에 나와 있다면 그대로 해야만 한다. 결과는 상관이 없다. 그저 절차대로 했으면 결과가 어떻든 책임은 면할 수 있는 것이다. 혹시 모를 미약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전체를 불신의 대상으로 보고 감시를 위한 행정을 하는 것이다.


일례로 교사들은 일년에 들어야 하는 수십 시간의 의무연수가 있다. 연수는 해마다 늘어서 아동학대, 안전, 청렴, 다문화, 평가, 소프트웨어 등 셀 수가 없다.  대부분 온라인 연수로 동영상을 보면서 번거롭게 페이지를 넘기는 작업을 해야 연수를 <이수>했다는 확인을 받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은 매년 듣는 뻔한 내용의 동영상을 수십시간 동안 들여다 보고 있지 않는다. 다른 일을 해가며 페이지를 넘기고 특별한 프로그램을 써서 재생 속도를 높이는 꼼수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교육적인 효과도 미미한 연수를 어거지로 들을 때마다 나는 시간이 매우 아깝다고 느낀다. 이럴 시간에 내일 가르칠 교과서를 한 번 더 들여다 보거나 교실 청소를 하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연수를 지시한 담당자들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사가 연수를 잘 받았느냐가 아니라 <이수> 확인이 되었느냐일 뿐이다. 담당자들도 윗선에서 지시한 것을 충실히 따라서 연수를 받은 교사 수를 통계에 넣기만 하면 책임을 완수한 것이 된다. 그 통계 결과야 말로 그 교육청의 성과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테니 말이다. 마치 그들은 더 많은 연수가 더 유능한 교사를 만드는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교사로서의 삶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직접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보고 그에 맞게 아이들을 만족시켜 주고자 나의 의지와 창의력을 발휘하여 수업을 구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디어들은 3월 교육과정을 짤 때 완벽하게 미리 계획될 수 없다. 내가 만날 아이들은 매년 다르고 상황 또한 변하기 때문이다. 어떤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수업 중에 튀어 나오기도 하고, 아이들이 급작스레 제안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 주고 받으며 수업을 만들어 간다. 이런 과정들은 꽤나 즐겁고 만족스럽다.


아이들의 생활도 그렇다. 사건과 사고는 예고없이 찾아오고 친구 관계도 변화무쌍하다. 아이들의 성격도 제각각, 가정과 자라온 배경도 제각각이다. 예측할 수 없이 벌어지는 상황들 속에서 아이들과 나는 기민하게 대처할 방안을 궁리하고 그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은다. 일련의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며 아이들도 배우지만 나도 아이들도 이 교실 사회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량화 할 수도 없지만 3월보다 내면이 충만해 진 12월의 아이들을 보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 이건 나와 아이들만이 알 수 있다. 보고서나 성과지표로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다시 공무원의 삶으로 돌아오면 찬란하던 천연색은 사라지고 흑백으로 바뀐다. 공무원에겐 아이디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꼼꼼하게 규정을 잘 숙지하고 성실하게 절차대로 기한내에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대우받는다. 교육청의 요구에 의문을 갖지 않고 상사의 지시에 순응해야 좋은 공무원이다.

반대로 '이걸 왜 해야하지?' 라고 늘 질문하고 어떻게 하면 불필요한 걸 생략하고 효율적으로 할 순 없을까 하고 꾀를 내는 나는 이상한 공무원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새로운 걸 시도하려 하고 주어진 틀 안에서 꼼꼼하게 공문을 처리하지 못하는 나는 아무리 해도 좋은 공무원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도 옆 반 선생님은 주어진 행정업무를 기한 내에 처리하느라 수업 중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고 토로한다. 주어진 시간, 한정된 에너지를 이미 120% 쓰고 있는 그 선생님을 교사 자격이 없다고 비난할 수가 없다. 이미 그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데에 충분한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옆 반 선생님은 불과 몇 명의 사람들만 들여다 보게될 수십쪽짜리 교육활동 보고서(그나마도 다 읽혀질지 모르는)를 쓰느라 여념이 없다. 그 와중에도 그 보고서를 검토할 책임이 있는 결재권자들은 토씨 하나를 물고 늘어질지도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레이아웃 방식에 서류를 여러 번 반려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일도 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수업 대신 영화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활동 보고서는 다른 교육청보다 우월해 보이고자 하는 우리 교육청의 수많은 성과 지표 중에 하나가 되어 서고에 고이 모셔지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나는 공무원이 아닌 교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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