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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o Choi May 01. 2016

타인의 삶 그리고 니체

Das Leben Der Anderen 2006



장르: 드라마

국가: 독일

러닝타임: 137분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Florian Henckel von Donnersmarck

필모그래피: 투어리스트

개봉 연도: 2007.03.22 / 2013.01.17(재개봉)

등급: 15세 관람가

배우: 주연: 울리히 뮤흐-비즐러 역

             세바스티안 코치-드라이만 역

             마르티나 게덱-크리스타 역

             울리히 커터-그루비츠 역




영화의 배경은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인, 1984년 동독을 배경을 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독은 사회주의 체제의 나라였기에, 정부기관의 힘은 강력했을 겁니다.


주인공 비즐러


그런 시대에서 주인공인 비즐러는 정부의 비밀경찰 슈타지에서 감시자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 정보 요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 한국으로 치면 국정원 정도 되겠네요.

도입부에서 아주 건조하게  주인공인 비즐러의 캐릭터 소개가 이루어지는데 차갑다 못해 눈빛에서 호흡법에까지 건조함이 드러납니다.

초반 강의하는 장면과 취조하는 장면이 교차되며 진행되는데 강의실에서도 취조실에서도, 감정의 동요 없이 체제 안에서 충성을 다하는 캐릭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연적으로 영화라는 매체에서의 캐릭터 설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설명이 부족하게 되면 발단 부분에서 개연성의 미약을 만들어내고, 영화의 스토리가 아무리 좋아도 관객과 소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타인의 삶의 캐릭터 설명에 대한 씬은 조금 고전적이고 뻔해 보여도 의문을 남기지 않는 설명법으로 다음 흐름에 집중하기 충분해서 좋았습니다. 



좌측- 크리스타, 우측- 드라이만


그리고 다음 소개되는 또 다른 주인공이 나옵니다.

우측에서 보이는 남자가 극 중 유명 연극 연출가인 드라이만, 좌측에 그의 피앙세이자 극 중 유명 연극배우인 크리스타입니다.

위 소개되었던 요원인 비즐러와 마찬가지로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관계, 현재 상태는 아주 간결하게 설명됩니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며, 극 중 정부 관료들이 주목할 만큼 유능한 재능을 갖고 있는 총망받는 일종의 스타로 등장합니다.


좌- 그루비츠, 우- 헴프 장관


그리고 극 중 갈등의 시작을 만드는 극명한 악인인 헴프 장관과 동시에 그루비츠가 설명됩니다.

사진 중 가운데 위치한 헴프 장관은 여주인공인 크리스타를 욕정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비즐러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감청하게 만드는 영화의 발단을 만드는 장본인이며, 부패한 권력자, 인간의 욕망, 관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출세지향형 관료로 비즐러의 동기이자, 동시에 상사인 그루비츠도 소개됩니다.

영화 전반부에 걸쳐 그루비츠를 통해 스토리가 진행된다고도 보일 만큼 비중 있는 역할이지만, 크게 엄청난 악당이라는 느낌보다는 그저 출세를 원하는 하수인 정도로만 비칩니다.

당시 사회주의 체제에 완전히 매몰당한 관료쯤이랄까요.


그렇게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 권력자들을 통해 영화는 전개되는데, 5년이라는 시간을 137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합리적이고 부드럽게 진행시킵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진행되어, 실화를 재구성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루비츠의 명령으로 비즐러는 그렇게 관음 하듯 감청을 하게 되는데,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보내는 삶을 엿들으면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떠한 감정과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의 신분, 직업과 그들을 통해 얻게 된 자아의 작은 조각이 내적 갈등을 일으키고,

그 내적 갈등에 처한 비즐러가 변화되는 모습은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과 함께 진행됩니다.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과하면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있고, 추후 감상에 도움이 아닌 선입견을 심어줄 여지도 함께 있으니 내용 설명에 대해서는 이만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영화를 통해서 나누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어갔는지를

진지하게 눈여겨보라!


살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85

-프리드리히 니체-


네, 뜬금없지만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인용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라는 말이 듣기 거북하다는 이유로 힘에의 의지라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원래대로 권력에의 의지라고 적겠습니다.

(아마도 정치적 권력이 주는 부정적인 시각이 작용한 듯 보입니다만, 니체가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더 발전적이 되려는 순수한 욕구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권력이란 것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발전적 힘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비열한 정치권력이 될 수도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좋겠네요) 


저는 이 영화 속 비즐러의 내면의 변화를 보면서 경직되고 강제적인 체제와 환경 안에서도 스스로 주인의식을 찾아가는 권력에의 의지를 보면서 비즐러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토리의 결말이 아닌, 비즐러가 찾게 되는 주인의식이 어떤 지점에 도달할 때, 마치 제가 비즐러가 된 듯이 기뻤고, 심장이 뛰었습니다.


잘 우는 사람은 아닌데 눈물이 주룩 흐르더군요.


21세기, 많은 사람들은 가치를 측정함에 있어 '물질'이라는 세속화된 관점에 침몰당한 것 같습니다.

저는 신이 죽은 이 시대의 끝자락에 선 우리가 조금 더 '무용하지만 더욱더 유용한' 내면적인 것들에게

귀를 기울였음 합니다.


극단적이고 억압된 사회 안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던 비즐러가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내면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갖고 진정한 나로 그리고 우리로 살기를 바라봅니다.



마지막으로 비즐러가 크리스타에게 하는 대사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해요. 왜냐면 당신은 당신 그 자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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