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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그립 Jan 22. 2024

나는 이제 착한 딸 안 할 거야 -3-

나는 엄마의 유일한 세계. 

엄마는 일주일에 서너 번 태워달라는 부탁을 했다. 가는 동안 조수석에 앉아 아주 사소한 부분부터 가장 큰 근심거리까지 털어놓았다. 청소를 하다 발등을 찧은 일, 아파죽겠는데 아빠는 신경도 안 썼던 일, 잠이 안 와 들은 유튜브 라디오의 막장 사연까지. 끝없는 이야기에 영혼 없이 "응, 응"만 하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왜, 오늘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물었다.


"애들이 밤에 자다 너무 깨서 잠을 몇 시간 못 잤어."


"그래, 그때는 잠 한 번 푹 자보는 게 소원일 때지. 너 낳고 무슨 일 있었는 줄 아니? 너네 아빠가 글쎄."


언제나 내 이야기의 끝을 묘하게 엄마의 하소연으로 이끌었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아빠 험담, 할머니 험담, 무심한 아들, 아파오는 본인의 몸.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다 쏟아놓았다. 차 타고 가는 내내 그런 말들이 이어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놓고 싶어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만나는 데도 함께 있지 않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의 공기까지 모두 전하고 싶은 사람처럼.



"딸은 클수록 엄마와 대화 상대가 되고, 친구가 되잖아."


아들만 셋인 내게 엄마는 딸의 필요성을 몇 번이나 말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이렇게 일방적인 친구 관계가 어딨어.'



처음에는 요즘 많이 외로운가 보다, 했다. 엄마는 점점 만나는 친구도 줄였으므로. 공통된 관심사가 줄어들고 가치관이 다르다며 만남을 꺼렸다. 다들 빠듯하다면서도 해외여행을 일 년에 몇 번이나 다니고, 골프를 치러 다닌다며 인상을 썼다. 엄마는 돈이 늘수록 일은 늘었다. 주위 친구들과는 점점 반대의 삶을 살았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것에 합리화를 하듯 여유를 가지며 사는 사람들을 폄하했다.





우리 엄마도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꿈이 런웨이를 사뿐사뿐 걷는 모델이었다는 엄마는 옷이며 화장에 무척 신경 썼었다. 동생과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부터 엄마는 이미 씻고 화장을 마치고 옷을 다 갖춰 입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항상 외출하기 직전인 사람처럼. 엄마 냄새는 분 냄새와 꽃향 나는 향수, 그리고 빳빳하게 다려진 옷에서 나는 폿폿한 석유 냄새. 


50대가 지나고 엄마는 달라졌다. 일하는 데 불편하다며 몸빼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1년에 한두 번 밖에 없는 친구 모임에 나가기 위해서만 화장을 했지만 최근엔 그 마저도 하지 않았다. 머리 하기도 귀찮다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모임에 나갔다. 최신 유행 미용기기는 가지고 있었는데, 먼지가 뽀얗게 쌓인 지 오래였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다. 오죽 대화 상대가 없으면 딸한테 이럴까 싶어 잠자코 말을 들어줬다. 들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라도 답답함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이었다. 그게 잘못된 거라는 인식이 뒤늦게 찾아왔다.



내가 임신 중일 때였다. 계속되는 주변인들의 험담을 들으니 스트레스를 받는지 배가 뭉치기 시작했다. 


"엄마, 태교에 안 좋으니까 좋은 얘기만 하자."


"어머, 그러네. 좋은 얘기만 해야지."


그리고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삶에서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그러다 꺼낸 말은 결국 아빠에 대한 불만. 원점이었다. 이제 사고가 부정적인 쪽으로밖에는 작동 안 하게 돼버린 걸까. 


만나는 세계가 줄어들면서 생각의 폭도 줄어들었다. 엄마는 이제 점차 대화 주제를 가족에 한정시켰다. 그나마 손주 얘기를 하면 잠시 기분이 나아지는 같아서 아이들과 있었을 즐거웠던 일, 재밌었던 순간들을 이야기하며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그마저도 다시 하소연으로 엮어지기 일쑤였지만. 


나만이 유일한 엄마의 세계. 그러니 유독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엄마를 싣고 한두 시간 다니며 하소연을 들어주며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게 엄마를 위한 일이지 않을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어릴 때는 엄마와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바빴다. 언제나 아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엄마는 항상 벽이 있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각자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힘들었으므로. 역시 두터운 벽을 치고 살았고, 엄마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다 결정적으로 엄마가 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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