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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몬도 Jul 18. 2020

말이 어려워진 상담사

글을 씁니다

중학교 즈음부터 친구들은 꼭 다이어리나 수첩 같은 걸 선물로 줬다. 여자 청소년에게 주기 좋은 선물이 대부분 비슷하다는 걸 생각하면 특별할 것 없어 보인다. 하이테크 펜과 당시의 ‘핫템’이자 일본에서 넘어온 반짝이 젤리 펜, 색색의 형광펜까지 모으면 주먹 한 움큼. 하드보드지로 만든 필통 속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이런 펜 무더기를 들고 다니는 여학생 한 명을 떠올리면 다이어리는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는 선물인 데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외 없이 같은 선물을 받고 있다면 별스러운 지점이 맞다. 신년에 친구들은 카페에서 한 잔 한 잔 커피를 마시고 받은 다이어리를 선물해 주곤 한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때 트래블 다이어리를, 취미로 하면 잘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캘리그래피 펜과 노트를 받고, 생일이라서 필사 노트를 메신저 기프티콘으로 받은 일까지. 오랜 기간 같은 종류의 선물을 받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모르는 새 주변에서 내가 ‘쓰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일력. 이것 외에도 수없이 많다.

이들은 내가 쓰기를 무척 열망했다. 그러나 좀처럼 쓸 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하던 일이란 맞은 편에 앉은 내담자와 주로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상담자 자리에 앉은 나는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부지런히 상담 기록지 위에 펜으로 옮기고 있다. 먼저 단단한 아크릴 클립보드에 종이를 올려놓고 중요한 내용들을 빠르게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녹취 동의를 받은 것에 한하여) 그날 진행한 녹취를 들으며 지난 상담을 복기한다. 앞에 마주한 내담자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 그들의 삶과 심리 구조를 이해하고, 추후 상담에서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각 내담자의 인생을 사례별 파일에 담아 보고서의 형태로 끼워 넣는다.

 

선물받은 다이어리는 꾸준히 쓰진 못해도 여행 때에도 들고 다녔다.

나의 삶은 주로 말로 이루어졌다. 외향적인 면이 두드러진 성향인 내게, 말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 더없이 편리한 도구였다. 상담심리사라는 직업은 내게 제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했다. 방금 처음 본 내담자와 접수상담을 하고, 단체 심리검사 실시와 해석상담을 한다. 대학에서 근무할 때엔 500-600명의 신입생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1시간 30분짜리 교육을 10회 정도 하기도 했다.

나처럼 강연하는 일을 반기는 상담사는 많지 않다. 상담심리사는 학회에 가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그리 흔한 직업이 아니어서인지, 나를 먼저 만나 본 사람들은 심리학도 내지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성향이 외향적이라는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놀라지 마시라. 인턴 상담원으로 수련할 당시 5명의 동료 상담자 선생님은 모두 내향형이었다. 또한 내가 바라는 상담사의 모습도 그런 모습이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잘 듣고, 중요한 질문을 통해 내담자가 스스로 삶의 방향을 찾도록 내담자 발밑에 손전등 하나 켜 두는 상담사.’ 내가 경험한 바로도 이런 분들이 안전감과 신뢰감을 준다. 내향형 상담자가 상담을 더 잘하는 것 같기도 하고.(쭈굴 쭈굴)

 

이렇게 말이 편한 건 모든 인생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삶을 산 이유도 있을 터.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주변 사람들은 ‘정상적’ 사회에서 요구되는 생애 과업들을 어렵지 않게 돌파해 나갔다. 나 역시 오래 연애하던 애인이 있고,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분야에서 자격 수련을 하며 사랑과 일,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으니 어느 것 하나 숨기거나 얼버무릴 이유가 없었다. 말을 할 때 나는 내가 꾸려 놓은 삶에 대해 자신 있었다.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힘든 시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목구멍이 콱하고 막혔던 시절, 침묵이 편했다.

 

이혼이 흉이 아닌 세상이라고 하지만 하필 내게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을까. 그즈음 회사에서 선임과의 관계도 어려워지자 나는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오랫동안 침묵했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필요한 말 이외엔 입을 닫고 있었다. 입을 열고 말을 한다는 게 이렇게 버거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현재 겪는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상상 속 청자’(listener)를 반대편에 두고, 두 입술을 떼어 말을 하는 상황을 생각만 해도 목구멍이 콱하고 막혔다.





속마음이 언어를 만나지 못해서 부유하던 시절에도 나는 한 대학 심리상담센터의 상담자였다.

심리검사, 해석상담을 하며 내담자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자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상담자가 내담자보다 먼저 감정을 쏟아 내서는 안 되기에 전에도 그렁그렁한 눈으로 상담을 한 적은 있을지언정 정말로 눈물을 흘린 일은 처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로 하지 못하는 내가 상담자 자리에 있고, 나 대신 언어화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가 내담자 자리에 있었다.


 그 상담 회기가 그 센터에서의 마지막 상담이었다. 그 뒤로도 말을 못 하던 내가 어느 날 사무실에서 공황 어택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병가를 쓰고 복귀한 그 길로 부서장에게 ‘쉬어야 하겠으며 현재 나의 상태로는 내담자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를 대고 퇴사했다.

한 가지 다행인 일은 내가 눈물을 보였던 날에 만난 학생이 ‘상담 선생님이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좋았다’며 그 주에 바로 심리상담으로 연결되었다고 전해 들은 일이다.

 

그즈음부터 나는 말을 하는 대신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준 두꺼운 다이어리에 쓰면 쓸수록 종이에 적는 일은 하고 싶진 않았다. 처음에는 펜을 쥐고 적었지만 그때 하고 싶은 말들은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 밑바닥의 감정들뿐이었다. 종이로 남겨서 타인에게 읽힐까 두려운 마음과 함께 내가 나의 더러운 감정들을 목격하게 되는 일도 망설여졌다.




속마음을 써야하니 잠금이 되는 일기장 어플로 일기를 쓰곤 했다



민낯 같은 감정을 손으로 적다가 오른손이 아려 오게 될 즈음 다이어리는 서랍 안에 깊숙히 넣어 두었다. 그 다음부터는 스마트폰 일기장에 적기 시작했다. 어플은 이중 잠금이 되어 안전했다.

내 목소리는 성대를 울리는 소리에서 작은 스마트폰의 불빛 나는 화면 위로 옮겨 갔다. 나만 볼 수 있는 이중 잠금 일기장 어플에 그때의 외로움과 불행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블루투스 키보드를 얻은 다음에는 더 많은 말을 손으로 옮겼고, 키보드의 타닥타닥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안정감을 느꼈다. 혼자 있어 종일 아무 말 하지 않는 날도 키보드 소리와 내가 적은 글이 활자가 되었다. 심연에서 건져 올린 언어가 내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며 글을 쓰는 동안, 힘든 시기를 지나고 미래에서 읽을 나, 그리고 현재의 나처럼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린 이들을 떠올렸다.

블루투스 키보드를 얻은 첫 날 사진. blog를 오랜만에 시작했다.


 그렇게 글은 말할 수 없게 된 오랜 침묵을 기다려 주었다. 글은 상대편에 누군가가 앉아 있을 때와는 달리 울거나, 나보다 더 속상해하는 얼굴을 하질 않고, 위로의 말로 감정을 희석하지 않았다.

하얀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로 아주 천천히 쓰더라도 내가 언어로 옮기는 만큼만 알아주었다. 글은 내게 더 아무것도 더 묻지 않았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인생의 변곡점을 지난 후의 삶의 이야기를 힘껏 쓰며 살아 내고 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쓰기를 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상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서성이는 누군가를 위해서,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삶의 모양을 만난 이곳에서 삶과 글을 쓴다.



본 원고는 2W매거진에 기고한 글입니다. 2W매거진은 글 쓰는 여성들의 공유작업실 '신여성'을 기반으로 구축된 매달 발행되는 에세이 중심의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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