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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Feb 12. 2019

뜨거울 수 없는 청춘들의 '소확행'

“어쩔 수 없어, 그냥 지금 이대로 살아갈래.”

나름 인스타그램의 헤비유저로서 얻게 된 꿀팁은 밤늦게 올린 게시물이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는 것이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유독 밤늦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듯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경험에 비추어 생각을 해 보면, 종일 나에게 주어진 수많은 일들을 해낸 고단한 하루의 끝에는 그 날의 ‘소확행’을 찾아내어 기록해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 날 우연히 찾은 맛집이라든지, 처음 사서 먹어본 맛있는 마카롱, 드라마를 보며 시켜먹은 야식, 잠깐 들린 한강 공원 등등이 모두 ‘소확행’, 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런 나만의 작은 행복을 ‘#소확행’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나면, 내가 이 바쁜 일상에서도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다른 사람들이 올린 #소확행 게시물을 보고 있자면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이 헬조선에서도 소확행을 꿈꾸는 청춘들’이라는 일종의 연대의식까지 생기길 마련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솔직히 묻기로 했다. 나와 너, 우리는 정말 힘든 일상 속에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뜨거운 청춘’인 것인가.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 ‘YOLO(You Only Live Once)’라는 말이 먼저 등장했다. '욜로'란 인생은 오직 한 번 뿐이니 지금 현재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즉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저축과 투자 대신 확실한 현재의 기쁨을 위해 사고 싶은 것을 사고, 하고 싶은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요즘 청년들 가운데 '욜로'를 지향하는 이른바 ‘욜로족’이 등장했다고 보도해댔다.


그러나 '욜로족'으로서의 삶은 사회에서 존중받을 수 없다. 우선 그들의 '욜로'는 수많은 기업들로부터 소비 촉진의 광고수단으로 이용당한다. 소비주체로 실컷 이용을 당하고 난 다음의 욜로족의 존재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며, 적당한 집에서 먹고 자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삶조차 녹록지 않다. '욜로'의 삶은 단지 멋있는 가치관의 전환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이면에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


오늘만 살겠다는 욜로는 기존 사회의 규칙에 저항하는 멋있고 대단한 일이나 아무나 할 수 없다. 결국 대부분의 청춘들이 욜로의 길을 포기하고 기존의 규칙 아래에서 열심히 살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규칙은 소득, 자산, 교육의 불평등이 삼위일체를 이뤄 형성한 다중 격차로 점철된 지 오래다.


따라서 ‘나의 노력’으로 그 격차를 극복하여 ‘개천에서 난 용’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알맞은 직장 잡아 집 구해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평범한 삶’조차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는 드높은 꿈이 되어버렸다. 즉 노력과 최선으로 현실의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단지 평범하게라도 살기 위해 그렇게 노력을 했으나 결국은 그 불안정성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더 가깝다. ‘소확행’이라는 말은 이 불안의 수용 속에서 도피처가 되어준다. 


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향한 꿈은 이 힘겨운 시대를 뜨겁게 살아가는 청춘들의 열정이 아니라, 사실은 그 뜨거운 열정은 이미 포기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청춘들의 효과적인 자기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직서를 쓰고 여행을 떠나는 욜로의 삶은 살지 못하더라도 퇴근 후 맥주 한 캔을 따는 소확행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행복이 항상 소소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는 외면한 채, 바꿀 수도 이길 수도 없는 구조이니 그저 이 제한된 행복에 만족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현실의 불안정성에 파묻혀 버릴지 모르는 ‘멋진 욜로’가 될 바에야, 차라리 그 불안을 최소화하며 이따금 ‘주체적으로’ 소소한 행복을 찾는 ‘착실한’ 청춘으로 남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망적 이게도, 고단한 하루의 끝을 ‘#소확행’으로 마무리하는 우리들은 힘든 일상 속에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뜨거운 청춘’이 될 수 없다. 오늘도 내일도 소확행을 꿈꾸지만 여전히 현실의 불평등을 수용하며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고 그나마 갖고 있는 것들을 악착같이 지키는 노력만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확행’이라는 말은 이런 청춘들이 더욱더 그들의 삶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조리한 사회의 규칙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게 한다. 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상쇄시킬 뿐이며 동시에 ‘그냥 지금 이대로 살아가겠다’는 처절한 변명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소확행을 강조하고 장려하는 사회는 이토록 교묘하게 청춘의 청춘 다움을 앗아가고 변명만을 증폭시킨다. 결국 소확행의 세상에서 청춘은, 더 불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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