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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ug 18. 2022

나의 초능력들 26

메모 하기 : 망각과 기억 사이의 이정표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가

기억 하기 위해 메모하는가


영감은 게으르게 떠오르고 부지런하게 잊혀진다. 좋은 아이디어일수록 모래와 같아서 담아 두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손에 쥐었던 느낌마저도 잊히기 일쑤다. 그리고 나면 그 생각들은 다시는 내게 오지 않는다. 어찌나 매정한지 생각이 지나간 지문이나 발자국이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아 종종 애타게 만든다. 어차피 내 것이 될 생각이 아니었다고 위로해 보지만 심각하게 매력적인 생각이었다면 한동안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런 나쁜 기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주머니마다 작은 수첩을 넣어두던가 스마트폰의 첫 번째 화면에 메모장 앱을 눈에 띄게 박아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는데도 기여할 터이다.  


샤워를 하다가 떠오른 기똥찬 생각들, 소등한 채 잠자리에 누워 떠오른 기막힌 생각들은 메모가 가능한 상태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과감한 용기를 부리지 않으면 머지않아 후회로 돌아온다. 가장 메모하기 힘든 순간일수록 가장 메모할만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이것을 무슨 법칙이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게 한다. 놉! '머피의 법칙' 말고 메모의 징크스에 걸맞은 것으로 말이다. 가장 멋진 아이디어는 메모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떠오른다.


항상 가장 멋진 아이디어는 메모하기 어려운 상황에 떠오른다


메모는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 찍기와 닮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광경 앞에서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면 연기처럼 사라진다. 다시 그곳에 온들 이전의 풍경은 아니다. 비슷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잡아내는 구도의 차이가 아니라 부리는 감각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메모는 사라지는 연기의 꼬리를 붙잡고 추는 춤이다. 불가능한 시간은 이제부터다. 메모의 마법이 펼쳐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메모의 첫 문장은 어두운 밤에 방문의 문고리를 잡는 것이다. 이제는 당기기만 하면 그다음의 문장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이끌고 간다.


메모는 예측 불가능하기에 그 흔적들도 제각각이다. 카페에서 떠오르면 찻잔 옆에 놓인 냅킨이 제격이고 그 번짐의 필체는 촌각을 다투는 순간처럼 박제된다. 음식점에서 떠올랐던 생각은 받은 영수증의 이면이 적합한데 계산대 위 모나미 153 볼펜으로 쓴 뻑뻑한 글씨로 남아있다. 메모는 낙서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남겨질 메모와 버려질 메모 사이에서 낙서의 맥락은 필터 역할을 하게 된다. 크로키처럼 머릿속 무언가를 급히 그려내다 보니 내가 적어놓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메모들도 수두룩하다. 세 잎 클로버가 풍부해야 그 속의 네 잎이 더욱 눈부실 테니.


나의 초라한 능력은 흘러가는 생각들의 어느 순간을 수시로 메모하는 일이다. 글쓰기는 운동처럼 몸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날마다 하려면 메모의 신세를 져야 한다. 물론 메모가 지속적인 글쓰기의 미끼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관찰과 사색의 보조 도구로 적합하다. 메모가 글쓰기에 있어서 안전벨트는 아니지만 방석이나 쿠션 정도는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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