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숲오 eSOOPo
Aug 16. 2022
나의 초능력들 24
현상+관계 읽기 : 아무도 말한 적 없는 것들의 재미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의지
장면 I
3년 만에 대학 동기들이 모인 어느 횟집. 늦은 시각, 탁자 한 편으로는 술병들이 볼링핀처럼 가지런하게 도열해 있었고 동기들의 얼굴은 볼링공처럼 동그랗게 상기되어 있다. 조금만 더 취한다면 한 녀석이 일어나 물수건으로 동기의 머리를 닦은 후 나란히 놓인 소주병을 향해 힘껏 던지며 스트라이크를 외칠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의 수다는 여자의 그것보다 더 자잘하고 쉼이 없다. 대화는 무한 도돌이표 노래다. 잠시 귀신이 다녀간 듯 정적이 흐른 틈을 타 나는 불쑥 떠오른 신기한 이야기가 있어서 주위를 환기시키며 말을 꺼냈다.
나 - "야! 야! 내가 재미있는 게 생각났는데 들어봐!"
놈1 - "뭔데? 재미없으면 죽는다?"
나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이를 모두 합쳐 겨우 100살이었잖아."
놈2 - "근데?"
나 - "우와! 오늘 우리 나이를 합쳐보니 200살이 넘네! 신기하지 않냐? 우리 우정이 백 년이라구!"
놈3 - "어? 그랬구나. (정적) 그래. 니 앞에 있는 안주 이리로 넘기구 머리 박아!"
장면 II
식사 위주의 1차 자리를 파하고 본격적인 마시고 죽자 판을 벌이고자 이자카야를 찾았다. 동기들의 걸음은 현란한 갈 지(之) 자였기에 누군가 보았다면 택견 동호회 모임의 거리 공연으로 오해했을 것이다. 스텝이 엉켰으면 슬로~ 퀵! 퀵! 탱고였을텐데... 모양새가 부끄러워질 무렵 적당한 장소에 모두 착석했다. 음소거가 된 한쪽 벽 커다란 텔레비전에는 일일 감염자 수가 폭증하고 있다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테이블이 만석인 이곳의 손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자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1차와 동일한 좌석배치로 앉은 후 동기중 가장 멀쩡한 녀석이 아까보다 독한 술과 가벼운 안주를 주문했다. 대화의 관심이 일에서 건강을 거쳐 돈으로 넘어갈 무렵 무심히 나도 최근에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어서 말을 슬며시 던졌다.
놈1 - "그래! 넌 요즘 뭐 돈벌이는 좀 어떠냐?"
나 - "별 건 아닌데... 얼마 전에 주가 폭락했을 때 그냥 은행금리도 낮고 해서 잠시 여윳돈을 재택근무 관련주랑 에너지 관련주를 조금 샀었거든...
놈2 - "얼마 전에 우크라이나 사태로 에너지 관련주 급등하지 않았냐? 그래서 얼마나 번거야? 어?"
나 - "아. 역시 넌 국내 최고의 애널리스트라서 잘 아는구나. 그냥 조금 벌었어. 아주 쬐금"
놈3 - "와우! 넌 잘 될 줄 알았어. 내가! 너 아까 보니까 식사도 신통찮던데 안주 뭐 먹고 싶냐? 자주 보자!"
동기들은 각자의 무용담과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들을 마신 술만큼 쏟아내고 돌아갔다. 모두가 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들이었고 서로의 엑스트라였다. 아까의 모습은 20대 청년이었다가 돌아갈 즈음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조금은 지쳐있는 등에 손을 흔들며 그들의 안녕을 바랐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사소함에 대한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나는 장면 II보다는 장면 I에서 이야기할 때가 더 신이 나고 재미있었다. 나만의 이야기보다는 동기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통의 이야기가 더 의미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이기에 가능한 현상들과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사소함들은 여기서만 유효하기에 소중한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가능한 이야기라면 나는 동기들을 만날 이유가 더욱 희박해질테니 말이다. 아무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의지가 나의 초라한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