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만지기 : 포착하고 포획하고 포용할 때까지
우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범주를 구분해 보자. 보였다가 내 눈앞에서 '잠시 사라진 상태'의 보이지 않음과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는 '개념이나 추상'의 보이지 않음이 있을 것이다. 전자의 '부재' 보다는 후자의 '추상'으로서의 보이지 않음에 천착하려 한다. '부재' 또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지만 '추상'보다 약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즐기는 것은 나만의 유난스러움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는 것도 친구와의 우정을 실감하는 것도 인터넷 뱅킹으로 돈을 주고받는 것도 만져지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고 시스템 안에서 서로가 약속하는 것이고 나 홀로 혹은 집단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이다.
내 눈앞에 그것을 보여서 증명해봐!라고 말하지만 내 눈앞에 가져다 놓을 수 없는 것들이 더 믿을만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는 것보다 스케일도 컸고 변화무쌍했으며 고착되어 있지 않아서 모호하다는 비난 섞인 원망도 듣지만 자꾸 그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자꾸 보다 보면 진짜 보이는 것 같다.
무엇이 그러했을까. 기술보다 과학이 그러했고 과학보다 철학이 그러했으며 철학보다 예술이 추상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만지는 것은 촉각 되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보다 환상적인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는 것들의 리듬과 사뭇 달라서 흐름 속에서 포착하고 포획하고 포용하지 않으면 없던 것이 된다.
보이는 것들은 공간과 시간에 갇혀 나의 시선을 녹슬게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로부터 자유롭기에 공간은 흩어지고 시간은 멈춘다. 시공간의 낯섦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허상' 혹은 '가짜'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의 반란이다. 그만큼 역동적이고 에너제틱하며 진짜의 본질을 증명한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보이는 것들만큼 열광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정도가 깊어질수록 그 대상은 현란하게 나의 지적 욕구를 자극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을 구원하고 있으며 보이는 것들을 더 잘 보이게끔 하는데 아무도 모르게 기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