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콩을 고르고 있어요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 간 그들의 삶의 궤적을 더듬다 보면 위안이 되기도 하고 긴장이 되기도 한다.
특히 지금의 내 나이에 그는 어떠했을까를 보는 일은 흥미롭다.
사례는 나이가 드러나기에 생략한다.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여전히 허우적거렸을까.
위인답게 위대한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기만 했을까.
연보에 나타난 것만으로는 그의 태도와 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하나같이 어김없이 펼쳐지는 그들의 청룡열차 같은 질곡의 삶은 엿볼 수 있다.
나라면 이쯤에서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을까.
나락에서 몇 년 후에 보란 듯이 기적적으로 재기하는 위인들이 적지 않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들에게 포기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무쇠 같은 멘털을 배운다.
삶은 계속된다는 교훈을 새삼 되뇌게 한다.
내가 잘 보이지 않을 때에는 자꾸 주위를 기웃거리게 된다.
거울을 보지 않는 이상 나는 나의 몸을 정확히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탓에 전체가 보이는 타인이 나보다 성숙하고 온전해 보이는 착시가 한 몫한 까닭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한 번도 두 번 가본 적이 없는 길을 날마다 가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매 순간의 내 선택들이 흔들린다.
매 순간의 내 결정들이 불안하다.
매 순간의 갈림길들이 무섭고 두렵다.
남들은 알아서 정해진 길들을 가는 시냇물처럼 유유히 잘 흘러가는 것 같아 보인다.
나만 뒤를 자꾸 돌아보고 옆을 흘낏거리는 것만 같다.
나만 섣부른 선택을 하는 것 같고
나만 최악의 결정을 하는 것 같고
나만 갈림길에서 선택불능자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암산하지 못해 종이에 직접 써가며 풀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지의 답안처럼 말이다.
글쓰기는 복기하는 일이니까 나의 선택들과 나의 결정들과 나의 갈림길들을 다시 되짚어보거나 더듬어가며 더 나은 콩을 고르는 심정이 그나마 최선이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꼭 끼니를 챙겨야지'라고 말하지 않아도 적어도 한 끼는 챙기지.
허기라는 것이 굳이 다짐을 하지 않아도 밥을 먹게 해.
글쓰기도 그랬으면 좋겠어.
글을 쓰려면 끼니처럼 어떤 허기와 공복을 가져야 할 것 같아. 그건 위장이 아닌 영혼의 문제.
영혼의 허기가 없어서일까.
그래야 끼니처럼 글쓰기의 공복이 나를 짓누를 거야.
글을 안 쓰고 쓰러지지 않겠어? 너의 영혼이!
그런 위기감을 체면 걸어야지.
나의 육체만큼 영혼에게도 포만감을 안겨주려면 말이야.
육체를 만족시키려면 영혼이 거들어야 하고
영혼을 충족시키려면 육체가 수고로워야 공평하니까.
난 오늘도 영혼을 수발들기 위해 손가락으로 글을 쓴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