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든 때를 빼기 위해 뜨거운 물에 삶아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드리듯 원상복구를 위해 다른 에너지를 쓰는 시간이다.
마냥 손을 놓고 텅 빈 영혼을 말리기만 한다면 쉰 다음에 나는 나의 냄새는 쉰내에 가까울 것이다.
성실하게 문제를 만들었기에 부지런히 문제를 푼다. 푸는 것은 늘어놓는 일. 주중에 맺은 매듭과 꼬인 매듭들을 휴일에 늘어놓고 풀 것인지 자를 것인지를 고민한다. 고민도 수고롭다면 그저 늘어놓은 채 바라만 보아도 좋을 일이다. 인간사란 게 시간이 열쇠를 쥐고 있는 경우가 팔 할이니 어쩔 수 없다. 덮어놓고 외면하면 다음날에는 덩치가 더 커진 모습으로 내 뒤에서 어깨를 툭툭 칠 테니 방심해서는 안된다. 고민과 걱정으로 코팅된 문제들은 물 냄새만 맡아도 자라는 콩나물과 같다.
쉰다는 건 숨과도 연결된다.
쉬는 일이 장판의 단면적에 내 몸의 어디까지 밀착이 가능한지를 실험하고 데이터를 시간대별로 비교관찰하는 일에 비슷할 것 같지만 사실과 다르다. 주중에 타자와의 부조화로 거칠어지고 불규칙해진 호흡을 조율하는 복원의 시간이다.
그래서 휴일에 쉬다와 숨을 쉬다가 모양이 유사한 것이다.(눈은 흘기지 마시고 ㅡ.ㅡ)
잘 주말 쉬었다는 말은 다시 숨을 잘 쉬게 될 정도로 몸과 마음의 정리, 조율을 잘 마쳤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저 밀린 수면을 알뜰하게 수행해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것은 쉼에 대한 오해 탓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바빠서 간과했던 것들을 관찰하는 걸 추천한다. 시간의 향기라든지
꽃의 몸짓이라든지
바람의 언어라든지
공간의 결이라든지
그대가 천천히 의미 있게 바라보는 순간 침묵하던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수다가 쏟아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