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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l 11. 2024

호텔 라마다

0760

어떤 무수한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 사이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존재한다.


새들이 펄럭이고 꽃들이 팔락이는 순간마다 무수한과 아무런이 아무렇게 어지럽혀진다.


그때를 알아차리고 눈을 껌뻑이고 코를 벌렁이고 입을 실룩거리고 고개를 까딱거리고 손을 모은다.


기껏해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찰나인 줄도 모르고 기억의 창고를 열어젖히고 바가지로 쓸어 담는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겨우 허무예요


난생처음으로 가장 커다란 빈 그릇을 가지고 나니 허허벌판이 어릴 적 골목길보다 아담하게 보인다.


까마득한 맞닥뜨림이 무언지 알 것 같다.


무릎에 무리가 가면 바른 자세가 아니어서 보폭을 조절하거나 구부릴 때에 힘의 안배를 살펴야 한다.


나아지는 것은 결국 익숙한 자세를 획득하는 일.


건강해지려면 이 움직임을
매일 한 스푼씩 복용하세요


낡아짐은 새로움보다 자연스럽지만 예측불허이다.


새롭기 위해서는 규칙이 유용하나

낡아지기 위해선 패턴이 무용하다.


깊은 낡음을 가지려고 작은 새로움들을 장착한다.


내가 몰랐던 이야기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이야기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거품이 일고 순서가 바뀌고 소리를 지른다.


가만히 숨을 고르다 보면 그간의 모든 슬픔과 불안이 잘못된 몸의 움직임에서 온 것임을 안다.


나를 조율하고픈 날에는 바르게 누워 왼발을 하늘높이 일자로 올리고 오른팔을 나란히 올린 후 5초 동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웅장한 고요를 길어 올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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