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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Dec 09. 2024

낭독의 환희

0911

청중 사이로 노벨위원회 관계자와 한강 작가가 나란히 입장한다


중앙 자리에 앉자 머리 힐끗한 첼리스트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5번을 연주한다


긴 듯 짧은 듯한 연주가 끝나자 진행자의 간략한 소개를 받고 연단에 오른다


안경을 가만히 벗어 놓고

빛과 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습니다 로 시작한다


한국어로 읽는다


우리말이 이토록 아름다웠구나


새벽 두 시에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강연을 통역 없이 듣는다


스웨덴 스톡홀름 아카데미에서는 한국어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마치 작가의 이름처럼 잔잔한 물결의 강 같은 목소리다


작가의 작품세계와 '쓰는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들을수록 글의 내용보다 소리의 울림에 집중한다


빠져든다


낭독의 환희


스토리보다 작가의 마음이 더 가파르게 달려온다


쓰는 것이 육체의 일이라면 읽는 것은 마음의 일, 호흡의 일, 존재의 일


뜨거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차분해 진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는데 가슴이 콩닥거린다


한반도에는 요란하게 세상을 바꾸려는 한 한국인이 통치를 하고 있고

스웨덴에서는 조용하게 세상을 이해하려는 한 한국인이 강연을 하고 있다


어떤 몸짓이 대한민국을 껴안을 수 있을까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이처럼 실감나는 새벽이 처음이다


중간에 목이 마른지 컵에 물을 따르고는 마시지는 않는다 이것도 하나의 언어일까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작가의 기나긴 시간 품었던 두 개의 질문이 바뀌자 벼락같은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대목을 듣자 눈물이 핑 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어떻게 들었을까


시낭송 같은 혹은 노래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한국어의 아름다움이 작가의 작품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 가슴 벅차게 한다


31분 5초 동안의 낭독은 하나의 장편 시 같으면서 하나의 거대한 자전적 수필 같다


현실에 매몰되어 허우적 거리고 있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근원에 대한 질문들을 너무 오랫동안 놓치고 살았음을 돌아보게 하는 깊고 하얀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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