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0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아무에게도 욕망이 되지 않는
가만히 책상에 앉아 밀린 고전을 읽으며
이따금 하늘에 퍼진 구름 조각을 만지며
잔잔히 라디오 가사 없는 음악을 들으며
나의 다이어리에는 온통 공란이 있어서 행복하다
헛바람 같은 약속도 없고
공갈빵 같은 모임도 없고
어깨뽕 같은 행사도 없고
연말에 이곳저곳에서 오라고 손짓하면 내가 그럴 듯한 존재로 여겨지고 한 해를 잘 살았구나라고 안도하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다 오히려 바빠지면 내가 너무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그렇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으니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는 상태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지만 무엇으로도 채우지 않는 그런 기운
후자의 에너지가 전자의 에너지보다 부지런하고 힘이 세 보인다
불량식품 같은 시간들을 폐기하고 산림욕 같은 시간으로 교체한다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욕조 속 처럼 안겨진 나만의 시간들이여!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적막한 시간에는 눈부신 우주가 끝없이 펼쳐지고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가 출렁이고 그 위로 별들이 쏟아지고 무수히 모래알이 반짝이고 그러다가 고깃배가 지나가고 고래가 커다란 물기둥을 뱉으며 호흡을 하고
장관을 보기에도 바쁜데 요즘처럼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