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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o 준우 Oct 17. 2023

벨라루스

고생 끝에 고생 그리고 해탈

'이건 또 왜 안 나와?'


처음 벨라루스의 민스크 국제공항은 공항의 느낌 보다 시골 터미널 같은 느낌의 공항이었다. 

수하물을 찾는 컨베이어 벨트는 활주로와 컨테이너 박스 같은 공항 건물 사이를 쉼 없이 돌아가며 승객들의 케리어를 뱉어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함께 탑승했었던 승객들은 하나 둘 수화물을 찾아가고 마지막에는 나를 포함한 세 사람만 빈 컨베이어 벨트 앞에 남게 되었다. 


"다 나왔어, 짐 못 찾은 사람들은 저쪽 항공사 데스크로 가서 접수해."

???


수화물을 옮기던 공항 직원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고, 옆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런 질문도 없이 항공사 접수 데스크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이때 무엇인가 크게 잘못됨을 느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들을 따라갈 수밖에. 이윽고 내 차례가 왔을 때 항공사 직원은 냉소적인 말투로 말했다. 


"네 짐은 아직 모스크바에 있어. 우리가 짐을 찾으면 호텔로 택배로 보내줄 테니까 여기 주소랑 전화번호 쓰고 가면 돼."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렇게 고생을 해서 1차 목적지에 도착했건만, 러시아 국적 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출발 시간이 늦어진 탓에 내 짐을 미처 싣지 못하고 민스크로 와버린 것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긴 비행시간과 환승 구간이 있었기에 최대한 가벼운 차림과 기내 수화물을 챙겨 비행기에 탑승했고 중요한 짐들은 전부 위탁 수화물로 부쳤기 때문이다. 벨라루스에는 총 2일 체류 예정이었고, 당장 오늘 갈아입을 속옷조차 없었다. (이 부분은 알아서 해결했다.)


하지만 누구의 말마따나 쇼는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바지 차림의 나는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터덜터덜 입국장으로 걸어 나갔고 거기에는 이번 여정을 같이 떠날 우즈베키스탄 파트너 윌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윌렌은 우즈베크에서 가지고 온 선물이라며 전통 의상을 입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조각상을 건넸다. 

약 올리는 건가

공항을 빠져나와 드디어 도착한 호텔에서 우리는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구단 미팅에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민스크에서 우리가 북한으로 데리고 갈 구단이 있는 살리호르스크 (Saligorsk)는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였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팀을 평양에 데려가야 하는 입장에서 반바지 반팔로 온 나를 보면 구단에서 더 믿지 않을 것만 같았다.


"민스크에 도착했다고 하고, 시간이 많지 않으니 출국 날 공항에서 만나서 같이 가자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연락 한번 해보죠."


다행히 구단에서는 먼 길 날아온 우리의 진심이 통했는지, 마음을 돌려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고, 그날 저녁 내부 회의 끝에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는 답변을 전해왔다. '과연 이 말도 믿을 수 있을까.' 항상 말이 바뀌었기에 이 말도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미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던 하루를 보냈기에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차도 잊고 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구단 미팅을 가지 않아 하루의 여유가 생긴 우리는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대회 기간 내내 같은 방을 쓴 윌렌은 우즈베크 국적의 고려인으로 나와는 영어로 소통을 하지만 러시아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한국에서 생활을 했기에 어눌하게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덕분에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는 벨라루스에서 돌아다니는 것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레닌의 동상이 있는 정부 청사와 거리에 있는 건물
한적하고 여유로운 민스크

경유를 했던 러시아를 제외하고, 내 생의 첫 유럽, 유럽 도시는 민스크였다. 썩 유쾌하지 않았던 어제의 감정과는 다르게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는 꽤 특이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곳곳에 있는 구소련 시대의 건물들과 조형물 그 사이사이 있는 동유럽풍의 건물들이 역설적이게도 어울리지 않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그날따라 맑은 하늘은 도시의 쾌청함을 더해 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경기가 있는 주말이 아닌 주중이라 경기를 관람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언제 또 벨라루스를 올 일이 있을까. 유명한 팀이 아니더라도 외국에서 경기 자체보다 경기장을 찾아 응원 문화, 경기 운영 등 경기 외적인 것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무척 아쉬운 일었다.


"형 그래도 스포츠로 밥 먹고 사는데 여기까지 와서 경기장은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디나모 스타디움

시내 관광을 마친 우리는 FC 디나모 민스크의 홈구장 디나모 스타디움 (Dinamo National Olympic Stadium)을 찾아가기로 했다. 항상 경기장 운(?)은 좋다. 마침 구장은 관리를 위해 개방되어 있었고, 경기장 내부도 운 좋게 구경할 수 있었다. 디나모 스타디움은 2만 석 정도의 규모의 러닝 트랙이 둘러져있는  종합 경기장이었고, 관중석은 벨라루스 국기를 연상시키는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있다고 했던가. 뜻밖의 여유로운 하루를 보낸 우리는 숙소에 돌아와 짐과 다음날 출국 일정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전화를 받은 건 다음날 체크 아웃을 한 시간 앞둔 오전 10시였다. 


-스페인 빌바오에서 (2023)

*본 글의 북한말은 실제 워딩과 다를 수 있음

*글에 사용된 사진과 동영상은 모두 직접 촬영한 것으로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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