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물 로비에서 찾아가세요.”
그토록 기다리던 내 캐리어가 도착한 건 벨라루스를 떠나는 날, 바로 그날이었다.
‘손해배상 청구되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나의 소중한 케리어는 이곳저곳 긁히고 부러져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약속했던 시간에 맞추어 공항으로 향했다. 다행히 공항 앞에는 우리와 여정을 약속했던 구단의 유니폼을 입은 유소년 선수들, 지도자들 그리고 부모님들이 나와 있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대회 참가를 번복하며 나를 곤경에 빠트리고 이 먼 타국까지 오게 만든 그들이었지만, 이렇게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번졌다.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주노고, 한국에서 너희를 데리러 온 에이전트야.”
영어로 건넨 인사를 윌렌이 러시아어로 통역을 해주며 살리호르스크 15세 팀에게 첫인사를 했다. 이후 짧게 아이들을 마중 나온 부모님들에게 대회 일정 설명과 안전함을 강조한 뒤 첫 번째 경유지인 모스크바로 향했다.
민스크 – 모스크바 – 노보시비르스크 (시베리아) – 블라디보스토크 – 평양
처음 모스크바에서의 끔찍했던 경험과 다르게 모스크바와 노보시비르스크를 거치는 경유 항공편은 지연 없이 순조롭게 탑승할 수 있었다. 특히 시베리아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항공편을 탈 때는 생애 첫 비즈니스 좌석을 경험하며 편하고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남는 티켓이 없어 협회에서 어쩔 수 없이 비즈니스로 끊어준 것이었던 게 아닐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겼다. 평양으로 향하는 고려항공이 8시간이나 연착이 된 것이었다. 15명이 넘는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는 우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애들 밥도 먹어야 하고 하다못해 마실 거라도 사줘야 하는데… 어떡하지…’
블라디보스토크 고려항공의 체크인 카운터
이전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고 도착했지만, 공항에서 보내는 8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협회와 이야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많은 인원을 먹일 수 있는 예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와 같은 항공편을 기다리며 바닥에 짐을 깔고 누워있는 북한 노동자들을 보니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바우처가 있는지 물어보자.’ 캐나다에서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1년 정도 여행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던 나는 특정 시간 이상 길어지면 항공사에서 숙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내에 위치한 고려항공 공항사무실을 찾아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네까?”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항공사 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실제로 북한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것은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영어로 말을 하는 편이 안전할까 고민하던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을 가지고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 이번에 평양에서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벨라루스 팀 담당자인데요, 아이들이 대기 시간 동안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데 국제 항공법상 출발이 지연되면 바우처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요청하려고 왔어요.”
한국말로 ‘무슨 일로 왔냐?’라고 당연한 듯 물어본 것과는 다르게 한국말로 답변하는 나를 보고 조금 놀라 보이는 그는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 보자 그런 조항이 있었나?”
직원은 옆에 있던 동료에게 되물으며 책상 서랍을 뒤지며 혼잣말을 연신 내뱉었다.
‘그러면 그렇지, UN 제재받는 마당에 국제법이라고 따를 리가 있나.’ 속으로 반 포기를 하고 있었지만, 무슨 용기였던지 나는 책상 앞에 의자에 앉아 앞에 놓인 ‘로동신문’을 읽는 척하며 기다렸다.
“선생님, 나가서 기다려주시라요.”
앞에서 뻔히 지키고 있는 내가 불편했던 것인지 그 직원은 나에게 나가서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럼 사무실 밖에 있는 의자에서 기다릴게요.”
얼마나 지났을까 나에게 나가서 기다려달라는 직원은 한 손에 한 뭉치 바우처 티켓을 들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거기에는 8달러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 쓰여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팀의 식사는 해결할 수 있었다. 순간의 기지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나는 지루하지만, 아이들과 통하지 않는 영어로 대화도 하고 장난도 치며 지루했던 대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탑승한 고려항공의 항공기는 내가 타보던 항공기와는 사뭇 달랐다. 옛날 이발소에서 있던 것 같은 딱딱한 의자와 흡사 오래된 노래방에서 보았던 것 같은 카펫 같은 재질로 된 항공기 내부 벽면은 이미 이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북한 국적기 고려항공과 기내에서 제공되는 '코코아 탄산단물' (콜라)
조금은 찜찜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만끽한 뒤 드디어 평양순안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처음 내린 북한의 공항은 한 마디로 어두웠다. 마치 아파트 복도에서 들어오는 불처럼 흐릿흐릿한 전구 몇 개가 켜져 있는 입국 심사대로 우리는 이동했다.
입국 심사 구역에는 제복을 입은 북한 출입국관리원들과 경찰들이 있었고, 그곳에 외국인은 우리 그룹밖에 없었다. 그리 많지 않은 인원에 비해 넓은 공간과 앞에 지키고 서 있는 낯선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삭막하다 못해 위협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형, 제가 먼저 심사받고 입국 목적이랑 대회 설명 할게요. 마지막에 애들 다 통과시키고 와주세요.”
무서웠다. 분명 대회 주최 측에서 발송해 준 초청 공문을 가지고 왔지만, 일전의 여러 사건이 있었던 탓인지 입국 심사대로 향하는 그 짧은 몇 초간 식은땀이 수없이 흘렀다. 이윽고 마주한 입국 심사관에게 초청장과 여권을 보여주며 입국 목적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의 캐나다 여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나에게 물었다.
“여기에는 고향이 서울이라고 되어있는데, 지금 거주지가 어디십네까?
나는 이때 처음 내 여권에 출생지가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긴 했는데 어릴 때 이민 가서 부모님도 저도 캐나다 밴쿠버에 살아요.”
재빠르게 잘 둘러댔다고 생각한 나를 수상한 눈초리로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는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제일 마지막으로 다시오시라요.”
-독일 베를린에서 (2023)
*본 글의 북한말은 실제 워딩과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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