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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상에 빠지다
한 장의 사진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누렇게 익은 벼들 사이로 신랑과 신부가 멋들어진 포즈를 취하고 서 있다. 하객은 없어 보이고 오직 그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한적한 시골의 어느 평범하기 그지없는 배경을 무대로 사진 한 장 찍고 그것으로 결혼식을 끝냈다는 건데... 이건 도무지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결혼식을 하지 말까 생각도 해 보았다. 맨 먼저 부모님 얼굴이 겹쳐서 보였다. 수심과 염려 가득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면서 이제껏 키워 놨더니 이렇게 부모를 골탕 먹이고 수치를 안겨 주는구나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 결혼식을 안 할 수는 없다. 그건 사람의 도리에 어긋난다. 접점을 찾아보자.
되도록 작게, 그리고 간소하게, 그래서 덜 힘든 결혼식. 바라마지 않는 결혼식의 풍경이었다. 골머리 앓을 일 없는 그런 결혼식을 꿈꾸면서, 작은 결혼식 기획에 착수해 들어갔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은 의외로 순조롭게 풀렸다. 서두에 언급한 그 사진 한 장에 대한 이야기를 잘 버무려서 포장했다. 요즘에는 그렇게 간소하게 작은 결혼식을 참 많이 한다며, 세계 3대 거부 중 한 명인 미국의 젊디 젊은 ceo도 자기 집 마당에서 조촐하게 결혼했다는 사실까지 양념으로 얹었다. 작전은 성공했다. 연애도 오래 하고 연령도 꽉 찬 자식이 결혼만 한다고 하면, 형식이야 뭐 어떻든 상관없다는 것이 부모님의 입장이었다.
#2 암운의 전조
어쩐지 이렇게 첫술에 배부르고 보니, 이후로는 순풍에 돛 단 듯 척척 진행이 잘 될 것 같았다. 부모님의 승낙이 있고 난 뒤로, 결혼식 장소를 물색해 보았다. 예식장이나 교회 예배당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 지자체에서 빌려 주는 작은 공간이 있다면 수소문해 빌려 볼 생각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크기도 그리 크지 않고 되도록 여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리고 빌리기도 수월해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까지 끼어들자, 그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떫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가만있자. 이게 뭐지? 왜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아. ㅋ 손쉬운 결혼식을 희망했던 애초의 구상이 여지없이 뭉개지는 판국의 시발점이었다. 어쩔 수 없다. 수소문에 나섰다. 그리고 결국, 한 곳을 용케도 찾았다. 하늘이 도우셨다. 시에서 운영하는 교육 공간의 앞뜰을 ‘작은 결혼식’을 치르기 원하는 부부들에게 제공한다는 광고 문안을 발견한 것이다. 그 길로 연락을 해 봤더니, 이것은 정말 우리가 찾던 그곳인 것.
과거에 시장 공관으로 쓰던 부지를 리모델링해서 교육 공간으로 쓰고 있는데 그 앞뜰을 결혼식 장소로 대관해 주고 있었다. 경관도 멋스럽고 운치도 있는 데다 주변은 한적했다. 토요일마다 한 커플씩 100명 이내로 모이는 결혼식을 치르기 원하는 부부들에게 제공하는 특전. 마침 얼마 전부터 시행하게 된 것이라 많이 안 알려져 있어서 지금 예약하면 언제든 원하는 날짜에 빌릴 수 있단다. 그렇게 우리는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았다.
날짜를 박았다. 장소가 결정되고 나니, 결혼식에 들어가는 품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식 준비에 들어가는 일련의 과정들 중에 여러 가지를 차례로 삭제하기 시작했다. 웨딩 촬영, 지인 연락, 청첩장, 주례, 예복, 폐백 등을 과감하게 지웠다. 간소한 결혼식의 취지를 부모님이 설득해 주시고, 결혼식 장소도 무난하게 결정되고 난 뒤라서 행보는 더 과감해졌다. 첫술에 이어 두 번째도 술술 풀리니 이제는 정말 계획대로 골치 안 아픈 결혼식, 그야말로 손쉬운 결혼식이 눈앞에 당장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3 지운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내 나름대로 절차를 하나씩 지우는 것은 쉬웠는데, 그게 말처럼 쉽게 싹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다들 하는 것을 정하는 것에도 신랑과 신부 포함 양가 구성원의 그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는 상의가 끊임없이 오고 갈 텐데, 다들 하는 것을 안 하게 되기까지의 결정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신랑과 신부 포함 양가 구성원의 그 ‘왜 안 하는지, 안 한다면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지’ 하는 상의가 끊임없이 오고 간다. 지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논의가 오히려 더 복잡하게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스몰웨딩이 오히려 더 힘든 건지는 모르겠다. 결혼식 준비해 보는 것이 처음이고, 다른 결혼식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스몰웨딩이 손쉬운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판에, 다른 형태의 결혼식이 어떤지 말해 무엇하리. 일단 내 코가 석자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지 않나. 절대 쉬울 리 없는 그 길에 들어서서 한참 질주 중이다.
지우기 찬스는 어렵사리 어느 정도 매듭을 지었다. 이제 채우기 숙제를 풀어야 한다. 턱시도에 웨딩드레스가 아니라면 예식 때 입을 옷은 어떻게 고를 것인지, 주례가 없다면 다른 식순은 어떻게 할 것인지, 사진이나 영상 촬영은 어떻게 할 것인지, 결혼식 장소에 식사 장소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은데 어떻게 오신 분들 식사 대접할 것인지, 연락은 누구는 드리고 누구는 안 드리고 해야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기준은 무엇인지....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다.
#4 세상에 손쉽게 되는 일은 없다
수현이랑 개념 정리를 다시 하기로 했다. 그래, 우리는 쉽게 갈 수 없다. 이제부터는 어렵게 생각하자. 우리는 아주 어려운 숙제를 풀어가야 한다. 하나하나 간단한 문제들이 아니다. 결혼식 누가 쉽게 할 수 있다고 했는가. 아니다.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그 무수히 많은 일들이 우리 둘만의 문제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과 상의를 긴밀하게 해야 하는 것들이고, 무엇보다 단 둘이 모든 걸 해치울 수 없다는 것을 뼈가 저리게 느끼고 깨우쳐야 한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 둘이는 못 해 먹겠다. 빅 웨딩이건 스몰웨딩이건 결혼식 둘이서 준비는 못하겠다. 애당초 웨딩플래너 도움은 안 받기로 했으니, 도움받을 수 있는 친구들의 손길을 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실 인식이 점점 제대로 되어 갔다. 도움 안 받고는 불가능한 일을 벌였다. 스몰웨딩에 오히려 친구들의 큰 도움이 필요하다는 역설. 스몰웨딩뿐만은 아닐 것이다. 크든 작든 인륜지대사 결혼에는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주변의 여러 도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부 한 쌍 만들기 위해서도 한 마을, 아니 두 마을쯤은 필요할 것 같다. 작은 결혼식 준비하려다가 큰 코를 다쳤다. 이제는 겸손한 마음으로 두 귀를 열어 경청하는 자세로 엎드려 도움을 청하려 한다. 세상에 순 쉬운 결혼식이 있을까. 혹시 있더라도 지금 내 결혼식은 아닌 게 확실하다. 결혼식까지 한 달 남짓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