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곰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크보크 Nov 14. 2021

분노의 힘.

'분노'에 관한 시 두 편.

분노는 매우 큰 힘이다.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면 세상을 통째로 움직일 수 있는 힘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 윌리엄 센스톤.



1.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십사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시, 김수영 전집, 민음사


2.


분노의 날을 허락하라.

- 감정폭발법 검토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분노의 시간을 허락해

회사 화장실에 있는 거울을

망치로 때려 부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보고서를 집어던지고

결재판을 과장 자리에 날려 보내고

가게에 찾아온 악성 손님의 뺨을 때리고

성희롱 발언을 하는 전화기에

에이 개새끼야

아름다운 욕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감정을 파괴하는 자들을 향해

노동을 무시하는 자들을 향해

진심을 파괴하는 자들을 향해

과감하게 내리치는

분노의 망치를 주어야 한다


파괴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분노해야 정당한 삶을 누린다

화장실 거울

과장의 책상

그놈의 계산대

공포의 흔적을 새길 기회를 주어야 한다  


모든 책임은

거울책상계산대에 있고

회사와 국가는 상처 입은 분노를

보상해야 한다     

정덕재 시집,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스토리밥




3.

금요일 오후라면 한 주의 생을 마감하고, 지난 한 주를 돌아봐야 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분노할 것에 분노해야 정당한 삶을 산다는 것을 터득해야 하는 시간이다.  밟히다 죽어 간 지렁이는 꿈틀 다시 살아나야 하는 시간이고, 터져 나오는 화를 감당할 수 없어 가둬버린 심장에는 분노할 자유를 허락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러나, 동시에 금요일 오후는 그동안 분노해야 할 것에 정당하게 분노할 줄 몰랐던 나의 무지와 내가 욕했던 개들과 찰떡궁합을 이뤘던 내 욕망을, 나약해서 스스로 지렁이가 되기로 자처한 노예의 시간을, 먼저 거울처럼 환히 보아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개 같이 벌어서 개 같이 쓰는 개가 되지 않도록,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다 화풀이하는 개가 되지 않도록,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심장을 먼저 환히 들여다보며 부끄러워해야 하는 시간이다.( 분명 개한테 미안해지는 비유다.)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이십 원 십원 때문에 야경꾼에게, 탕집 주에게만, 땅주인에게는 말고 이발쟁이에게만, 그렇게 작고 만만한 것들에게쉽게 분노해 온 모래만큼도, 먼지만큼도 안 되는  의지와 정신'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비켜 서 는, 발가벗은 비겁을 보아야 하는 시간인지도 모른. 그렇게 발가 벗은 분노를 에누리 없이 ‘계산대’에 올려 값을 매긴 후, 노예이기를 자처한 시간의 몫만큼 십자가의 짐을 지듯 스스로 피 흘릴 각오도 해야 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정직한 감정과 포장 없는 진심과 내가 원하는 만큼의 노동의 자유를 허락하라고.

 이제는 더이상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겠노라. 더 이상은 심장에 스텐트를 박아 연명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단 하루를 살아도 꿈틀 살아 뛰는 자유로 살아가겠노라.

그렇게 당당히 외칠 수 있을 때에만 를 옥죄는 시스템에 대해 정당한 저항과 분노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분노의 과녁을 정확히 조준할 수 있는 것인지도.


그러니까 금요일 오후에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기꺼이 노예가 되기로 자처한 내 시간을 에누리 없이 정확히 '그놈의 계산대'에 올려 두고,  책임의 '책상'에 앉아 인간의 '유구한 역사와 정서'를 돌아보는 시간을 먼저 가진 후, 체에 거른 분노를 힘으로 사회와 국가 시스템이 간과한 무수한 개인들의 상처받은 분노에 대해 밝히고 정확한 보상청구할  수 있기를. 그렇게 분노의 과녁을 정확히 조준하는 내가  수 있기를... 

금요일 오후에는. 

다시, 다가오는 새로운 한 주의 역사를 쓰기 위하여 지나온 시간들의 배후를 제발 돌아볼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한 개인의 창조 서사 여정을 엿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