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나의 첫 기억은

아들을 다치게 한 가슴 아팠던 기억이었다

by 이담

내게 강렬했던 첫 기억은 엄마에게도 강렬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는 옛이야기로 가장 먼저 떠올린다. 당연히 엄마도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두고 일하는 그 시간이 편하기만 했을 리가 없었다. 그 전화가 귀찮기만 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지난한 시간들 동안 엄마가 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전화하지 마', '중요한 일 아니면 전화하지 마', '금방 갈게' 뿐이었다. 일을 해야 했으니까. 어렸을 때 전화로 수없이 실랑이해 왔기에 나는 나이가 조금 차면서 엄마에게 웬만해선 전화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대부분의 초등학교 시절 낮시간은 혼자 또는 오빠와 단둘이었는데, 그날은 내가 몸이 아파 학교에 가지 못했다. 겨우 한 살 많지만 오빠랍시고, 오빠는 학교에 다녀와서 아픈 나를 간호하겠다고 그 당시 말로 간소메, 내가 제일 좋아했던 복숭아 통조림을 까서 챙겨줬다. 내 기억에 당시 통조림은 통조림용 칼로 뚜껑 가장자리로 동그랗게 칼집을 내어 다 잘리기 직전에 뒤로 꺾어서 개봉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자른 통조림은 내용물이 든 원통모양 캔 끝에 그라인더 날처럼 동그랗고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한 형태가 간당거리게 붙어있는 모습이 되었다. 오빠는 통조림을 까서 그릇에 담고 나와 함께 나눠먹었다. 그러다 힘없이 통조림을 먹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내 앞에서 세상 영감에 안경잽이 모범생 캐릭터였던 오빠가 장난스레 춤을 췄다. 찰나의 순간, 바닥에 둔 빈 통조림통을 오빠가 밟았고 그라인더 날 같이 잘린 뚜껑이 발에 박혔다. 나중에 들어보니 1mm만 더 들어갔더라도 인대가 절단될 큰 상처였다고 한다.

이때 나는 역시나 기억이 없다. 오빠가 춤을 춘 것, 발로 절단된 통조림 뚜껑을 밟았던 순간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엄마가 오빠를 업고 병원 갔었던 것 정도였다. 엄마의 증언으로는 이랬다. 엄마의 직장으로 또 전화가 왔고, 나는 덤덤하게, 그리고 망설이며 천천히 말했단다.

"엄마, 전화해서 죄송해요. 이게 중요한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오빠가 통조림 통을 밟아서 피가 나는데 하얀색이 보여요."

아마도 하얀색은 살이 벌어져 뼈가 보였던 것이었을 테다. 엄마는 기겁해 집으로 달려왔고 오빠는 초등남학생의 발앞꿈치 가로면적 전체 길이에 달하는 기다란 절단상처를 열일곱 번이었는지 스물몇 번인지 를 꿰매는 동안 한 번의 '악'소리도 내지 않았단다. 오죽하면 꿰매어주던 의사 선생님이 당황해 "안 아프냐, 소리 지르고 울어도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빠는 "참을만해요"라고 했다. 나는 두고두고 가로로 길고 중간중간 바늘땀 자국이 남은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오빠가 나를 위해 춤을 춰줬던 이때를 떠올렸다.

엄마는 '전화해서 죄송하다' 했던 내 말이 가슴에 사무쳤단다. 몇 번이고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지금도 엄마가 이 일을 떠올릴 때면 벌써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불행히도 엄마의 이 가슴아픔과 짠함을 나는 사랑으로 해석하지 못했다. 오빠가 나를 위해 했던 행동이 불러일으킨 사고라는 생각에, 그래서 엄마도 오빠가 나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고두고 불편한 마음이 남았다. 물론 지금은 머리론 알고 있다. 가슴 아픈 마음도, 아픈 동생을 달래려 했던 마음도, 사실은 사랑이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엄마의 그 눈시울조차 나를 향한 원망으로 느껴져 불편했다.


되돌아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었다. 맞벌이 가정에서 흔히 그맘때 아이들이 혼자 집에서 부모님을 기다리곤 했었던 것도, 그러다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는 것도. 되려 이제와 나는 우리에게, 우리 가족에게 더 큰 사고나 사건이 나지 않았던 것이 행운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약한 첫 기억의 자라지 못한 나는 예닐곱의 마음으로 어른이 되었다. 자라지 못한 나는 성인이 되어서 까지도 나는 '엄마의 속상함'이 향하는 곳은 나와 오빠가 아니라 오빠의 상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그렇게 말하진 않더라도 사실은 나를 원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베란다에서 무선전화기를 떨어트렸을 때처럼, 그리고 시골로 버려진 것처럼, 엄마가 사랑하는 오빠를 다치게 했기 때문에 버림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엄마는 나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원래 나를 낳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나만의 망상을 더 해가면서 말이다. '사랑받지 못했다.',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라는 미숙한 확신은 오래도록 배어들어 또다시 곪은 감정을 만들어 낸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 '변해야 한다'라고 깨우치기 전까지, 나는 이런 곪은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알턱 없는 엄마는 일과 매일 술 취한 아빠와 싸움에 지쳐, 갈 곳 잃은 푸념 같은 원망을 목적 없이 그저 심연 속으로 던져 넣었다. 엄마는 그저 둘데없이 옥죄는 감정들을 털어냈을 뿐인데 그 심연 속에 조용히 앉아있던 어린아이는 엄마의 원망을 그대로 주워 담았다.


초등학교 때, 일 년에 한 번 정도 미술치료사라는 사람이 학교로 와 집, 나무, 사람을 그리는 검사를 하곤 했다. 그때 나는 항상 울타리가 둘러진 집을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가득 찬 줄기와 입사귀의 무게로 한없이 바닥을 향해 구부러진 느티나무를 그렸다. 매년, 똑같았다. 되려 해가 갈수록 입사귀가 풍성해지며 종이에는 그 끝을 그릴 수 없는 지경이 될 때까지 더 많이 더 크게 그렸다. 내가 대학교에서 미술치료를 배울 때서야 그 느티나무 그림이 깊은 우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게 사라진 기억들, 그것이 우울함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우울은 엄마의 우울을 먹고 자라났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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