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존재

어느 순간에도 그저 묵묵히 존재한

by 이담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대부분 취한 모습이다. 퇴근하면서 취해있거나, 그러면서 손에 소주병 두병이 든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휘청거리면서 돌아오던 모습. 술에 취해 잠들어서는 천장이 날아갈 듯 코를 골던 밤. 그러다 쿵! 하고 짧게 걷어차는 발길에 차여 나동그라지던 나.

그렇지만 초등학교까지 나는 아빠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술 없이 못 사는 아빠는 불행히도 평생 운전만을 업으로 삼았다. 택시, 관광버스, 화물차운전, 레미콘 운전까지 아빠는 운전이 유일한 재능이자 기술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마저도, 역시나 반복되는 음주운전 사고로 결국 더 이상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되었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택시운전기사에서 관광버스 기사로 넘어가던 때였는 데, 이맘때 우리 가족은 몇 번 없었던 가족여행을 떠나기도 했었다. 아빠는 신나 보이는 표정으로 전국 팔도 안 가본 곳이 없는 문화재와 관광지들을 읊어주며 어디든지 아빠는 다 갈 수 있고 다 알고 있다면서 뿌듯해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가족이 함께 간 여행지는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통틀어 단 두 번이었다.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에 대한 발표를 할 때면 나는 자랑스럽게 전국 팔도를 전부 꿰고 있는 척척박사 아빠를 소개했다. 그리고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학용품 같은 것을 두고 간 뒤 찾지 않으면 아빠가 나에게 가져다주곤 했는데, 나는 그것조차 '아싸' 하며 기분 좋게 받아 쓰곤 했었다. '아빠 최고', '아빠 짱' 시절이 나에게도 분명 있었다.

심지어 아빠는 매우 골초였는데, 90년대는 차 안에서도 집안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시대였기에 오빠와 내가 텔레비전을 보고 앉아있어도 아빠는 그 뒤에서 허연 연기를 방안 가득 뿜으며 흡연을 했다. 이 흡연 문제도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아빠는 재떨이 가득 담배를 피우고, 가래침을 뱉고, 그러면서 소주를 마셨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담배를 물고, 텔레비전을 켜둔 채 꾸벅꾸벅 졸다가 솜이불에 담배빵을 내곤 했다. 그래서 우리 집 이불에는 항상 담배로 지진 구멍들이 있었다.

담배 불똥이 떨어져 동그랗게 타들어 붙은 이불과 베개, 늘 방안 한구석에 자리했던 빈 소주병들, 그리고 연기로 뿌연 방안. 그리고 비명 같은 절규소리에 이어지는 말다툼소리. 심부름으로 소주 두 병을 사 오던 달그락거리는 한밤의 걸음소리. 비틀 대는 아빠를 초등학생 둘이서 양쪽에서 붙잡고 부축하다가 셋이서 함께 넘어져 버렸던, 그러다 들고 있던 새 소주병을 깨트렸던 순간들. 내 초등학교 시절은 내내 그런 장면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아빠를, 그리고 엄마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니, 나는 부모님을 정말 사랑했던 게 분명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빠를 공공의 적으로 두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해맑은 어린이가 자라,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머리 크고 '나 그래도 이제 다 컸어'라고 인지하면서 집안 분위기를 보고 엄마의 고통에 이입하면서 아빠가 싫어지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부부싸움이 나에게 튀어 별안간 눈물바람으로 이불속에 숨어 들어가면, 나는 나를 날세운 말로 찌른 엄마를 원망하기보다는 술주정뱅이에 골초인 아빠를 원망했다. 그 맘에 울면서 썼던 일기가 기억난다. [난 언제 죽을지 몰라도 분명히 폐암으로 죽을 거다.]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했고 그만큼 아빠를 닮은 나 자신을 미워했다.

맞다. 나는 생긴 것부터 먹성, 살집까지 아빠를 닮았다. 나는 늘 말하곤 한다. 진짜 돼지에게 돼지라고 놀리면 안 되는 거라고. 정말로 아빠를 빼다 박은 나에게 엄마는 "너도 아빠랑 똑같아"라고 비수를 꽂았다. 그래서 그토록 아빠를 미워하고 나를 미워했다. 그런데 후에 엄마는 오빠와 내가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에 부채감을 느꼈는지, 말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도 너네가 아빠한테 그러면 안돼. 아빠가 너희한테는 최선을 다했잖아." 사실 나는 이 말이 가장 이해가 안 됐다. 어떤 최선을 다했던 걸까. 그리고 그러면 안 된다는 엄마의 말도 이상했다. 엄마가 말해주고 보여준 아빠의 모습은 전부 지겹고 징그럽고 미쳐버리겠는 악몽이었는데 무엇으로 아빠에게 정을 붙일 수 있었을까.

후에 아동심리를 공부하면서, 부모가 자녀에게 배우자에 대한 험담을 하면 자녀는 자신의 뿌리를 부정당한 것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내 부정당한 뿌리가 썩어 들어 현재의 나에게 좋은 영양분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제야 되돌아본 아빠는 그냥 나이 들고 이가 다 빠져버린 늙은 사자였다. 아빠도 아빠의 고충과 고통이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걸 나눌 사람은 없었을 거다. 엄마에겐 내가 있었지만 아빠에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것까지 살펴볼 에너지가 당연히 나에겐 없었지만 아빠가 많이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탓이었을 거다. 내가 그러하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중에 내가 내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나 어릴 때는 어땠어?" 엄마는 말했다. "몰라 먹고살기 바빠서 기억도 안 나 살다 보니까 다 커있더라"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서운했다. 만 3세 이전에 평생 할 효도를 다한다는 말처럼, 이 조그만 아이는 그 존재 자체로 방금 전 있었던 힘듦이나 앞으로 20년, 30년간 있을 힘듦까지 모두 가져갈 기쁨을 준다. 그런데 엄마는 나에게 그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되려 나에게 서러움을 주었다. 나는 언젠가 한 번쯤은 엄마에게 벅찬 행복이었을 거라는 기대가 산산이 부수어져 버린 것이었다.

되려 얼마뒤, 내 아이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어떻게 이렇게 이쁜 아기가 태어났지"라고 감탄사처럼 내뱉었을 때, 곁에 있던 아빠는 담담히 말했다. "너도 아기일 때 저만큼 예뻤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예쁜 어린 시절의 나'가 아빠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바라고 바라왔던 그 말에 금세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엄마에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죽도록 미워했던 아빠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 한 문장에서 처음으로 내가 태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는 걸 느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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