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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Dec 24. 2021

소설<알쏭당>

냄새

호중은 두 번째 줄 학생답게 최단신을 겨우 면한 작은 키였지만 나와 학수와 달리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었다. "성룡은 시대의 갔어~ 앞으로는 이연걸의 시대야, 진정한 액션 배우는 이연걸이지~!"

어제 도장에 막 배운 요상한 자세를 하는 호중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교에서 유명한 싸움 짱인 형을 따라, 쿵푸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쉬는 시간이 찾아오면 동작을 보여주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호중은 혜성같이 나타난 새로운 무비스타를 치켜세웠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 성룡을 이제는 내리막 길을 걷고 있는 한물간 배우라고 평하고 있었다. 그런 호중을 학수는 참 재밌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학수가 호중에게 친근감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나와 호중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학수는 호중뿐만 아니라, 녀석이 이렇게 사교성이 좋았나 싶을 정도로, 뒷자리와 앞자리를 누비며 일명 고만고만한 키의 '스머프'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학수의 첫 선거전략은 앞줄의 맨 앞자리, 가장 체구가 작은, 어느 녀석을 모두가 지켜보는 교실의 연단에서 보기 좋게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모두가 13살이 된 지 꽤 시간이 흘렀건만 이 녀석만은 아직 초등학생 운동장에서 소꿉놀이를 할 것 같은 여린 체구로 얻어맞기는 했지만 극렬히 저항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안쓰러웠지만 어쩌면 동심의 나라에서 야생의 세계로 진입하는 신호탄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학수는 자신이 깔끔하게 두들겨 팰 수 있는 상대만 골라서 힘자랑을 하고 호중같이 힘에 부쳐 보이는 상대는 친구로 껴안았다. 학수의 그런 모습은 선거철의 정치인이 그러하듯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금세 자신의 세를 만들어갔다.  학년이 올라가고, 새로운 학교로 진학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는 등의 변화의 기로에서 누군가는 그동안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내기도 , 어떤 이는 당연하다고 굳어진 자신의 얼을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학수는 어린아이 같은 부드러운 세상보다는 거칠고 생존전략만이 유일한 남자들의 세계가 체질적으로 맞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갓 중학생이 된 나에게도 적용되는 같은 세상이었다. 말랑말랑한 어린아이의 세계에 더 머물고 싶은 나에 비해 그는 이런 세상을 미리 예상을 한 사람처럼 무섭게 적응해 나갔다. 학기 초, 교실을 메우던 어색함이 사라지고 각자 나름의 친구들이 생길 무렵, 어느샌가 나는 , 의지와 상관없이, 학수 무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누구도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학수가 우두머리인 그의 패거리였다.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근처 놀이터에 조직의 명령이라도 전달받은 놈들처럼 하나둘씩 모였고 호중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13살의 사내아이들이 좋아하는 취향이 있으면 얼마나 있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만은, 그 무엇보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이, 아직은 무엇을 할지 몰라 무료한 사내아이들에게, 무리를 한데 묶는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참말로 한 치의 분란 없이 정확하게 타깃을 정조준하고 한 명, 한 명씩 그들의 얼을 무너뜨렸다. 그것이 단순히 놀림이나 괴롭힘이 아니라 누군가의 영혼을 짓밟는 일이라고는 놀이터에 모여 돌멩이를 아무 감정 없이 던지던 학수 패거리는 알 길이 없었다.

나와 호중도 마찬가지였다. 첫 타깃은 안경을 낀 모습이 좀 우스꽝스럽지만 공부를 꽤 잘하는 녀석이었다. 녀석이 우리의 타깃이 되는 데는 어떤 명확한 이유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좋아할 만한 인물도 못됐다. 타깃은 학수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학수는 공부를 잘하는 놈들을 유난히 싫어했다. 

"학수 아빠가 대학교 교수라더라~ 국문과?"

엄마는 동네의 마당발답게 나도 모르는 혹은 알 길이 없는 학수 아빠의 직업을 건너 건너 알고 있었다. 아침마다 학수를 기다리느라 집안으로 들어가면 아직 이불이 널려있는 학수 방 한 켠에는 오래되고 낡은 책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책 냄새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책의 겉면은 세월을 나타내는 듯 누렇게 번져 있었고 방에서는 종이 냄새가 흘러나왔다. 책의 정체는 알 수는 없으나 학수 아버지는 학자일 거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방에 계시다네~ 아마 캠퍼스에 계신가 봐~ 학수 엄마가 참 사람이 좋으시더라~ 그래도 확실히 다르다~사업하는 사람들이랑, 교육자랑은 달라~"

엄마는 내심 중학교에 올라오자마자 교육자 집안의 학수와 친해진 걸 반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말로 표현을 안 했지만 규호보다 학수를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보기에 대학 교수의 아들이면서 같은 동에 사는 학수와 내가 어울리면 성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의 첫 번째 타깃은 어느새 교실에서 "디피 DP"라고 불렸다. 출처를 알 수 없고 기원을 알 수 없지만 녀석의 자리에서 똥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똥 묻은 팬티를 고집스럽게 입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학수가 그랬는지, 호중이 그랬는지, 내가 시작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은 정설로 굳어져 일 년 내내 녀석은 "디피"로 불리며 갖은 놀림을 당했다. 천장 한가운데 녀석의 체육복을 걸어 놓기도 하였고 칠판에 녀석의 별명을 그리는 것은 애교에 불과했다. 처음엔 녀석은 얼굴이 일그러져라 화를 내기도 했고 수업시간에도 계속 자행되는 놀림에 얼굴이 시뻘게지고 했지만 용케도 시험성적은 잘 나왔다. 학수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 독하게 골려 먹으려 했다. 우리의 타깃이 교실의 타깃이 되자 우리는 무엇이 된 것 마냥 더욱 한데 뭉쳐 다녔다. 비록 대여섯 명이지만 어울려다니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뒷자리의 덩치 큰 녀석들도 체구가 작다고 얕잡아 보는 놈들이 없었고 체육시간이면 자리잡기 어려운 농구 골대에서 마음껏 농구 게임도 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자 디피는 이제 우리만의 타깃이 아니라 반의 모든 애들이 따돌리는 상황이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학수는 흥미를 좀 잃은 것 같았다. 

"오~보이즈 투맨 좋아해??" 

가방에 뒷주머니에 꽂힌 '보이즈 투맨' 카셋트 테이프를 보고 건우가 말을 걸었다. 건우는 호중의 짝꿍이었고 우리 패거리와도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와도 격의없이 지내는 성격좋은 놈이었다. 

디피도 놀림감에 지쳐 눈물을 흘리면 옆자리에 가서 말을 걸어주던 사람도 건우였다. 건우는 비록 두 번째 줄에 앉은 우리와 같은 단신이었지만 성적이 줄곧 상위권이었고, 오랜 기간 수영을 해서 어깨가 쩍 벌어져, 어딘가 중학생 답지 않은 당당한 자태를 뽐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또래가 보기에도 남자답게 잘생긴 그의 얼굴이었다. 건우는 안경과 나비넥타이가 어울리는 범생이들 중에서도 항상 가운데를 차지하는 대장 기질이 있는 구심점 같은 놈이었다. 디피를 놀리는 것이 슬슬 지겨워지자 우리 패거리는 약간의 권태를 느꼈는지 잠시 개점 휴업을 하고 다른 친구들과의 교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건우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몇몇 애들을 불러 세웠다. 오랜만에 집이 빈다며 자신의 집으로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호중과 나 그리고 몇몇 애들이 건우을 앞세워 그의 집을 찾아갔다.

"와~존나~"

호중이 건우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나온 말은 욕이었다. 나도 실은 놀라고 있었다. 같은 단지였지만 이 동네에 2층 집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으니깐 말이다. 외국 영화에 나오는 나무 계단이 2층으로 나있는 건우의 집은 천장까지의 거리가 아득히 멀어 마치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호중과 나는 어린애 마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리 내려와~ 간식 먹어, 엄마가 너희들 온다고 해놓고 가셨어~"

어린 나이였음에도 건우는 건방지다거나 사람을 무시하는 그런 놈은 아니었다. 흐뭇하게 웃는 녀석의 표정은 언제나 담백했다.

"오~ 이건 뭐야??"

나와 호중은 세상에서 태어나 이렇게 큰 텔레비전은 본 적이 없다는 놀란 투로 동시에 말했다. 벽면을 가득 채우는 일본제 티브이보다 우릴 더욱 놀라게 한 건 일본제 게임기와 사운드가 빵빵해서 귀가 얼얼해지는 스피커였다.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의 정사각형의 각진 CD플레이어는 거실 한구석에 있음에도 한 눈에 들어왔고 둥근 CD를 밀어넣자 기계특유의 기분좋은 소릴 내며 은빛 사각형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생생하고 현장감있는 사운드가 영원히 닿지 않을 것 같은 천장까지 울려 파졌다.

"건우야~너무 행복하다~이 맛이지~히히"

천연가죽이라고 적혀 있을 것 같은 고급소파에 몸을 기대어 나도 모르는 폼을 잡으며 말했다.

"하하, 음악을 좀 아는 구나~가끔 놀러와~"

다음 날, 쉬는 시간에 되자 어제 건우의 집에 놀러 간 친구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영화관에서 게임을 하는 줄 알았다니깐~! 건우야 언제 또 집이 비는 거야?"

호중과 나 그리고 아이들은 건우의 집이 비우길 기다리는 도둑이 된 것 처럼 애타게 물어봤다. 

"어제 말한 씨디 갖고와~ 틀어줄게~"

건우가 어제 내 말을 기억하는지 잊지 않고 내게 말을 건넸다. 보이즈투맨 " END OF THE ROAD" 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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