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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Jan 30. 2022

소설<알쏭당>

냄새

새벽 두 시, 이제 막 잠에 들려는 찰나,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은 누군가에게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누난데 자니?"

누나.. 어렴풋이 잠결에 들려하는 정신을 무참히 깨우는 단어였다. 누나라는 호칭을 최근에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씨네필이었기에 문자를 읽는 동시에 그녀의 음성이 함께 귓가에 울렸다. 씨네필은 이른 새벽, 나에게 갑작스레 문자를 왜 했을까, 이미 난 규호와 씨네필이 진작에 헤어진 걸 알고 있었다. 

"너만 알아~ 누나랑 헤어졌어~말을 들어 쳐 먹어야 말이지.."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 대신 뜻밖의  분노를 드러내는 규호의 말속에서 지난했던 그의 연애를 대리 체험한 듯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대리체험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비약은 아니었던 것이 꽤 많은 시간을 규호의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누나와 함께 어울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서로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보다는 주로 싸우는 모습이나 규호가 일방적으로 히스테릭하게 신경질을 내는 모습을 본 것뿐이지만, 규호가 아니라, 씨네필과 내가 사귀었다면 이라는 부도덕한 상상의 밤을 보내여서 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연초록색 화면에 선명하게 새겨지자, 모두가 전화기의 혁명적 진화라며 호들갑을 떨며 한 손에 꼭 쥐고 다니던 둥글면서 납작한 유별난 기계가 처음으로 쓸모가 있어 보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꼭두새벽에 도착한 문자에 바로 답장을 하는 게 과연 누나가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이 드는 이 밤에, 당연하듯, 날이 밝으면 답장을 보내는 게 맞는 것일까? 갑자기 나에게 욕을 하고 싶어졌다. 병신 새끼, 넌 매사에 그런 식으로 머리를 굴려서는 평생 네가 원하는 그 무엇도 갖지 못할 거야, 지나고 보면 모든 후회는 마음속 피어나는 구체적 본능에 기대지 않고 그것이 마치 동물적일 거라는 막연한 궁리를 따랐던 행위였다.

"선영이 누나? "

떨리는 심장으로 씨네필에게 문자 전송 버튼을 눌렀다. 누나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짐작이 안 갔지만 휴대용 전화기라는 요상한 기계를 통해 온 세상이 잠든 야심한 새벽에 마치 편지를 보내듯 대화를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어ㅎㅎ 안 자고 뭐하니?"

내가 씨네필에게 묻고 싶은 말을 그녀는 마치 내 맘을 읽은 듯 말했다. 

"지금 막 잘려던 참이었어"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 그녀의 문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방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촘촘하게 천장을 가득 메운 눈부신 조명 아래로 두꺼운 플라스틱 껍데기 안에 영화와 배우들을 품은 테이프가 네 줄의 진열장에 차곡차곡 꼽혀 있는 씨네필이 펼쳐졌다. 아직 반납하지 않은 영화가 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횡단보도의 파란 불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거리를 비추는 씨네필의 조명에 이끌려 손 닿는 대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들어 겉표지만 보고 나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겉표지에는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제작사, 감독, 주연 배우, 줄거리, 무엇보다 몇 장의 스틸 컷은 영화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만들기도 했고 심지어 영화의 완성도를 추측하게 하는 길잡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씨네필의 모든 조명이 겉표지 속의 위노라 라이더, 샤론스톤, 캐서린 제타 존스이 아니라 누나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는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드는 행위는 더 이상 나를 설레게 만들지 못했다. 씨네필의 제일 가장자리인 19금 에로영화 코너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대화의 내용까지 정확히 귓가에 들어 올 정도의 초능력 같은 집중력이 생겼음은 물론이고 매장에 곳곳에 퍼져 있는 누나의 향수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나 천호동인데 올 수 있니?"

한동안 조용했던 핸드폰이 다시 울리자 그녀의 향수 냄새를 추적하던 예민한 후각의 기억은 어느덧 무너지고 천호동의 어느 술집 한켠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씨네필의 흐트러진 모습이 그려졌다. 규호에게 이별은 더 나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고 씨네필에게는 아픔이었을 거라고, 그녀가 보내온 문자 속 글자의 냄새를 통해 알 것만 같았다. 급하게 옷가지를 걸치고 동네 앞 대로에 나오자 거리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적막 속 암흑이었다. 씨네필에서 익히 세어 나오던 빛 한줄기가 저 멀리 어둠을 뚫고 택시 한 대와 같이 출현했다. 택시에 올라타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면서 편안해졌다. 씨네필을 만나게 된다는 설렘을 넘어서는 어떤 충동이 올라왔다. 그것은 마저 인식하기도 전에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났다. 그녀를 대면하기도 전에 이상하리만큼 흥분된 성기는 이미 그녀와 한 이불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에게 여러 번 훈련되어 있던 신체의 한 부분은 이제 실현 가능한 현실을 목전에 두고 급격히 달아 오른 게 분명했다. 빨간 신호에 여러 번 맥없이 멈춰 설 수밖에 없는 택시는 수그러들지 모르는 나의 신체와는 너무도 상반되어 그럴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술집과 유흥주점이 즐비한 천호동 거리의 한 복판이었다. 그녀가 알려준 술집은 어느 허름한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선술집이었다. 술집은 평일 늦은 시간을 말해주는 듯 한산했다. 한쪽 구석에서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왔고 어두운 술집에서도 그녀 홀로 조명을 받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런 미소에 화답은 해야 한다는, 예의 정도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씨네필은

이전에는 보기 힘든 지친 표정으로 담배 한 개비를 벗 삼아 소주 두병을 비우고 난 뒤였다.  

"미안해, 이 시간에 불러내서.."

취기에 살짝 혀가 꼬인 목소리를 내는 씨네필의 음성을, 문자가 아닌 면전에서, 확인하니 마음속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또 다른 충동이 살아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발 새끼'

그 순간만큼은 호중처럼 쌍욕을 규호의 면전에다가 침을 뱉듯 토해내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 일렁이는 격랑은 아랑곳 하지 않는 다는 투로 씨네필은 아무렇지 않게 소주를 잔에 따르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안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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