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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ul 16. 2024

하루가 1부와 2부로 쪼개졌다

친구들이 미국에 온 이후 하루가 마치 48시간처럼 길게 여겨진다. 아니,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하루가 1부와 2부로 정확하게 둘로 쪼개진 느낌이 든다. 1부는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 2부는 퇴근 후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친구들이 미국에 온 7월은 마침 보좌관이 1년 중 가장 바쁘지 않을 때다. 7월은 LA 시청의 휴회(recess) 기간으로 이 시간에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여름 휴가를 가거나 그동안 못다한 업무를 처리하며 여유를 부린다. 우리 사무실은 이 시기에 파격적인 보너스 휴가를 주곤 하는데, 올해에는 매일 1시간 일찍 퇴근하는 호사를 누리게 해줬다. 덕분에 나는 매일 오후 4시면 사무실에서 총알같이 튀어나와 집을 향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썸머캠프에 간 첫째들과 유치원에 간 둘째들을 픽업해주기 때문에 퇴근 후 아이들 학교를 들리지 않고 곧장 집에 갈 수 있게 됐는데, 때문에 4시15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통근거리가 짧다는 장점을 지금까지는 아이들 픽업 때문에 제대로 누리고 살지 못했는데, 오후 4시15분에 집에 도착해 그때부터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자 하루가 무진장 길게 느껴졌다. 오후 4시 이후의 삶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친구들과 같이 저녁준비를 하면 평소에는 꽤나 힘들게 느껴지던 요리/뒷처리도 그닥 힘들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역할 분배는 확실했다. 요리에 능숙한 친구 A가 총괄 요리사 역할을 하고 나는 보조 역할(사이드 요리)을 자처한다. 젊은 시절 온갖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움직임이 빠른 친구 B는 뒷정리와 설거지를 했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우리가 아이들 밥 먹이는 눈 깜짝하는 시간에 쌓여있던 설거지 거리가 사라져있곤 했다.


아이들의 저녁 식사가 끝나면 이제 엄마들이 밥을 먹을 시간이 왔다. 이때는 아이들이 티비를 시청할 시간이다. 다섯명의 아이가 티비에 시선을 돌릴 때에만 어른들끼리 조용한 식사가 가능했다. 사실 다함께 지내도 각자 육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우리 셋이서만 온전히 대화를 나눌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이들이 티비를 보는 약 30분~1시간 안팎의 시간 동안에만 우리는 우리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편 친구 A와 B는 떠날 날이 정해져있는 여행자이기 때문에 하루하루 허투루 시간을 써서는 안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에만 있으면 아이들 다섯명이 지지고 볶고 싸울 가능성이 높아져서 위험했다. 그래서 우린 저녁식사가 끝나면 무조건 다음 일정을 소화했다. 주로 단지 수영장을 가거나, 동네 쇼핑몰에 가서 아이스크림 사먹기, 공원 놀이터 가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도 저녁을 먹으면서 "그 다음 일정은 뭐야?"라고 물을 만큼 우린 매일 아이들과 함께 할 일정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매일이 바쁘다 보니 요즘은 과거와 미래를 떠올리지 않고 오로지 그날 '하루'에만 집중한 채 살아가고 있다. 몸은 바쁘고 피곤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채워지는 기분이 드는데, 아무래도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아예 결여된 삶을 살고있기 때문이어서 그런 것 같다. 몸 노동을 하고, 지쳐 쓰러져 사는 삶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걱정하고 살아봐야 인생에 도움될 건 하나도 없다. 악마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때 가장 유용한 방법 중 하나로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도록 유혹했다고 한다. 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일인데,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루가 회사에서의 시간 1부, 친구들과의 시간 2부로 나뉘어진 요즘, 매일이 기대가 된다. 아침에 눈 뜰 때 기대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삶은 얼마나 좋은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충만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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