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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ul 31. 2024

나는야 파워 'E'

MBTI에서 대문자 E를 보유한 사람의 이야기


친구들이 미국 우리 집을 방문한 시기는 마침 내가 일년 중 가장 바쁘지 않은 때였다. 매년 7월은 LA 시청의 휴회(recess) 기간인데, 시청이 문을 닫아 일이 널널한 이 시기에 우리 사무실의 대부분의 직원들은 휴가를 떠나곤 한다. 평소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에도 행사에 참여하느라 분주한 일상을 보낸 직원들에게 시의원 사무실은 포상 차원에서 매일 일찍 퇴근할 수 있게 해줬다. 덕분에 이번 여름 매일 4시면 집에 갈 수 있었다.


독립기념일 전날 또는 다음날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오후 12시면 사무실을 문을 닫곤 해서 더 빨리 집에 갈 수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재빨리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퇴근! 어디야?!


그러고선 곧바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튀어갔다. 친구들은 아이들이 썸머캠프에 가있는 동안은 대개 멜로즈에 가서 쇼핑을 하거나 LA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났다. 단비같은 조기 퇴근 소식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잽싸게 튀어갈 때면 친구들은 어김없이 말했다.


너는 진짜 파워 E다. 어떻게 쉬질 않아.


쉬다니? 내겐 친구들과 노닥거리는 게 쉬는 건데? 오히려 난 친구들의 그런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친구들이 미국에 와있는데도 회사에 가야해서 우리만의 시간을 제대로 못 보내는게 안 그래도 아쉬운 마당에 조기 퇴근이면 당연히 친구들에게 달려가야 하는거 아닌가?! 내겐 당연한 사실을 신기해하는 그들이 오히려 내 쪽에선 더 신기했다.


친구들은 아무래도 내가 한달동안 본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퇴근 후 집에와서 바로 단체생활에 참여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거라는게 그들의 예측이었다. 그러니 조기퇴근과 같은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그때라도 집에가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친구들은 배려했다.


그런데 그건 내 입장에서는 전혀 즐거운 제안이 아니었다. MBTI에서 파워 'E'를 보유한 나는 사람을 만나면서 힘을 얻는다. 집에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지금처럼 친구들이 미국에 있는 상황에서는 적용되는 사안이 아니었다. 만일 친구들이 밖에서 놀고 있는데, 내가 집에가서 쉬어야 한다면 오히려 역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터였다.


사실 바쁘지 않은 시기에 한국에서 친구들이 와준 게 내게는 신의 한수였다. 본래 우리가 일년 전부터 미국에서 썸머캠프를 함께 보내기로 계획했을 때만 해도 난 이직 전이었고, 고로 재택근무를 하던 직장인이었다. 기자로서 재택근무를 하던 시절에는 특종 사건이 터지지만 않는다면 평일 스케줄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었다. 


내가 꿈꿔왔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썸머캠프에는 재택근무를 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내 상황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었는데, 올해 초 갑작스러운 이직을 하는 바람에 그 꿈이 물거품됐다. 이직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에서도 우려됐던 건 ‘그럼 우리의 썸머캠프 계획은 어떡하지?’였다. 첫 일년은 휴가도 없는데, 친구들이 미국까지 왔는데도 매일 사무실에 박혀 일을 해야 하는 내 상황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때 친구 A는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런건 전혀 상관없으니 무조건 이직해야지!”라고. 단호한 A의 말 덕분에 근심을 덜고 이직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건지 친구들이 온 시기에 나는 이직 이후 가장 여유로운 나날을 보냈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몸이 쉴 틈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더 행복했다. 이직 후 무언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만 같아 울적한 기분이 들 때가 잦았는데, 친구들이 미국에 온 후 나의 모든 주의가 퇴근 후의 삶에 쏠리자 그간 느껴오던 불만족의 감정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직장'이나 '꿈' 또는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해 온 걸까, 하는 자각이 들었다. 인생은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만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번에 친구들이 미국에 오면서 직장생활에 매몰됐던 내 안의 꽉 막힌 공기가 환기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내 MBTI는 언제나 파워 ‘E’일 것임을 장담한다. 


집에서 놀면 뭐하니. 사람을 만나는게 난 체질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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