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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Apr 28. 2019

땅을 박차는 기분이 좋아 달린다

운동과 유달리 친했던 (여)학생, 운동부족 성인 되다 

어린 시절, 달리기는 가난함 혹은 헝그리 정신의 상징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달리던 주인공이 나온 <달려라 하니> 아니면 "라면만 먹고 달렸어요"로 유명한 임순애 선수의 이미지가 강렬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하고 불쌍한 소녀들은 현실을 잊기 위해, 메달을 따서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본격적으로 처음 달려본 것은 초등(국민)학교 시절 체력장을 하면서였다.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력의 크기 혹은 한계를 넘어서본 경험도 얼차려를 당할 때와 체육시간이었다. 체력장에는 1~5등급과 특급이 있었는데 바로 전 해에 5급이던 내가 어느 순간 힘들 때 멈추지 않고 달리는 법을 알게 되면서 '특급'을 기록한 것이 몸으로 성취한 최초의 기억이다. 체육 지진아에서 갑자기 우등생으로 거듭난 계기는 없었지만 더이상 무시받으며 살지 않겠다는 어떤 각성이 작용했던 듯하다. 


특별히 사교육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뭔가를 곧잘 배웠고, 폼 하나는 그럴 듯한 아이였다. 그리고 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작곡대회와 제자리 멀리뛰기, 그리고 수학경시대회 중에 어느 대회를 나갈 건지 상의해오라고 해서 엄마를 당황시킬 정도로 (천재나 영재는 아니어도)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뜀박질이나 멀리뛰기는 공들여 연습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오래 뛰기의 즐거움은 곧 잊히고 말았다. 

유달리 활동적이었던 어린 나에게, 마음껏 달리고 또 훈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지금쯤 트랙에 서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춘기가 찾아오고부터 여학생들에게 달리기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2차성징의 여부를 떠나서 여학생들은 팔을 힘차게 휘두르기는커녕 가슴께를 가리고 뛰거나, 선생들의 성희롱 발언에 주눅들어 열심히 뛰지 않았다. 그래서 못 뛴다고 또 타박을 당했다. 간혹 움직이는 일을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지만 땀 흘리는 즐거움이 그밖의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을 상쇄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몸이 굳어버린 채로 십대를 지나 대학엘 갔다. 


나의 대학 시절엔 춤을 추며 온갖 스포츠에 앞장서는 굉장히 액티브한 순간들이 많았다. 남자들 틈에 끼어서 농구를 하며 '굉장히 이상한 여자애' 취급을 당하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공을 잡는 척 하면서 가슴께로 손이 오거나 일부러 거칠게 밀치는 남자를 볼 때면 부아가 치밀었다. 그네들에게 운동장은 남자들의 성역이었고 난 그걸 침범한 열등한 존재였겠지만 그건 나대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움직이고 결과를 내고, 과정을 연습하는 일은 그만큼 중요했으니까. 적어도 글자로 이뤄진 세계는 그만한 성취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마라톤 트랙은 오랜 동안 남성만의 영역이었다. 그틈에서 생리혈을 흘려가며, 여성이니 뛸 수 없다고 배제당한 수많은 여성들의 역사가 있음을 기억한다. 


내가 가장 부러워한 사람은 학생회장도, 전교 1등도 아닌 방학 동안 노가다를 뛰어 등록금을 벌었다며 그을린 몸을 자랑하던 동기 녀석이었다. 내가 당시에 몸으로 할 수 있는 노동은 시급 2천원짜리 카페 알바뿐이었으니. 내가 다닌 대학이 도심에서 먼, 노선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그마저도 방학 때나 가능했다. 


어쨌거나 달리기는 이런저런 연유로 오랜동안 내게서 잊혀져있었고, 춤마저 추지 않던 30대 초중반에 급격한 체력과 근력 저하, 척추측만과 거북목 증세가 나타났다. 손목통증으로 양치하는 것도 힘겨운 순간이 오자 살기 위해 운동해야 할 처지가 됐다. 활동량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증세가 빨리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운동을 하던 몸은 갈고닦고 기름을 쳐줘야 제대로 굴러가게 마련. 쓰기만 하고 관리를 해주지 않으니 몸이 아우성을 쳤다. 


스포츠 마사지와 수기 관리를 받으면서 PT를 끊어 운동을 하고, 빚을 내가면서 식생활을 유기농으로 바꿨다. 트레이너가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해줘서 함께 뛰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 이 무렵. 월드컵공원 정상까지 오르막길을 쉬지 않고 뛰거나 계단을 경보하듯 걸어올라가면 죽을 듯 숨이 찼지만 얼굴에 와닿는 바람이 그렇게 상쾌하고 시원한 줄 미처 몰랐고 마실 물 한 모금의 소중함도 새로 깨쳤다. 뛰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나는 다시 몸의 세계와 친해졌고 여전한 운동능력을 갖게 되었다. 



미세먼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도심은 뛰기에 적합하지 않다. 미세먼지 마스크를 끼고서 뛰면 산소가 모자라 쓰러질 판이다. 러닝머신은 너무 재미가 없고, 결정적으로 뛰는 것을 완전히 대체해주지도 못한다. 어느 틈에 실내에서 케틀벨을 휘두르거나 요즘은 그것마저 맨몸운동이나 춤추는 것으로 때우고 있다. 며칠 전 공기가 깨끗한 날 러닝슈즈를 신고 나섰더니 이제는 십분을 뛰는 것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몸이 찌부둥하고 소화가 안 되고 화장실에 며칠째 못갔다 싶으면 운동량을 늘리는 식으로 관리하는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불면증이 심각하던 두어 달 전에는 잠이 안 와서 하는 수 없이 복근운동을 하고 스쿼트를 하고 요가도 했다. 그래야 겨우 동틀 무렵에 잠들 수 있었다. 살다보니 피지컬이 멘탈을 앞질러버리는 일도 가능하더라는. 요즘은 일 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땀을 흘리고 있다. 수면 패턴도 조금 나아졌고, 구내염 등의 염증성 질환도 꽤 좋아졌다. 며칠 전에 체력검사를 하니 나이에 비해 체력이 양호하다는 평을 받았다. 순발력과 민첩성이 상당히 좋다고 한다. 제자리 멀리뛰기는 연령 평균이 144인데 나는 168을 뛰었다(담당자가 약간 놀람...!). 달리기도 다시 연마해서 5킬로 30분을 주파하고 싶다. 왜 뛰냐고 묻는다면, 음 그건... 그저 두 다리가 땅을 박차는 순간의 기분이 좋아서라고 말하련다. '러너스 하이'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장 저렴하고 효과가 좋은 전신운동이니 뛸 수 있는 한은 뛰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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