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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일상의 올바른 비례는?

by 베를린부부

“어딘가 이상한데? 뭐가 바뀐 거지?”


불현듯 이전 바르셀로나 사무실에서 일할 때가 생각났다. 파브리치오도 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이렇게 금방 눈치채는 것이 나는 그저 신기했다. 전체 입면은 몇십 미터 중 불과 몇십 미터 바뀌지 않았다. 당황한 체 마우스로 이리저리 돌려보니 전체 길이가 조금 줄긴 했다. 어느 정도 비율이 바뀐 것 같았지만 전체에 지장이 없는 것 같아 특별히 따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건물이 수평적으로 기니까 입면은 수직적으로 상쇄해줘야 할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진 이야기에 하나 둘, 지나가던 직원들이 모이곤 했다. 유럽에서 일하며 가장 어색한 점이 바로 이거였다. 두루두루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와 질문들을 나누며 ‘결론 없이’ 의견을 나누는 것. 처음엔 그저 이런 업무 과정이 피곤하기만 했다. 첫 번째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떠들어야 하니 머리가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질문을 주고받는 문화 때문이었다. 사실 질문이야 말로 정말 중요한 소통의 수단인 걸 나는 너무 나중에 알았다. 그저 듣고, 어떻게 하지는 건지 화자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에 가장 큰 업무의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결정에 대한 자신의 의견으로 이와 소통하는 방법, 나와 상대의 의견에 대한 균형, 이런 것들이 너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업무 방식보다 가장 적응 안 되는 건 ‘비례’였다. 분명 공부하는 동안 누군가가 비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접했을 것이다. 교수님이던, 선생님이던, 책이던, 분명 접했을 그 미묘한 비례의 비밀은 지나간 내 기억 속 어딘가 있다. 그 추상적으로만 느껴지는 단어가 어떻게 나의 컴퓨터와 마우스에 표시되는 지를 너무 늦게 알았을 뿐이다. 눈으로 익히고 직접 손으로 몸으로 체험하며 느낀 경험치에서 나오는 그 비례. 경험이 확신을 주는 그 비례에 대한 감이 못내 부러웠다. 경험에 기반한 비례의 감은 그 사람의 도면에서, 스케치에서, 모형에서 나타나곤 했다. 그걸 구현하기 위해, 가라앉기 위해 부단히 발을 굴렀다. 황금비율이니 뭐니 하는 가로와 세로의 비율, 특히 어떠한 비율에서 사람들은 ‘아늑하다’ 느끼고 말하는가, 대체 ‘이 정도명 괜찮은 비율’이라고 소통하는 그 감은 나에게 새로 배워야 하는 영역이었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에서 출발한 비율에 대한 인지는 모니터를 넘어 모든 부분으로 넘나들기 시작했다. 주거 시설의 비례, 업무 시설의 비례, 문화 시설 등이 적절한 비례가 다르듯, 일상의 여러 부분도 각기 나름 적절한 비례가 있다. 특히 내부 중정이 많은 도시에서는 그 미묘한 비례에 따라 갇힌 느낌이 들기도 하고, 탁 트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고대그리스나 로마, 르네상스 시절 등을 거친 황금비가 자연스레 일상에 녹아든 탓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통해 쌓인 경험치들이 문서나 입을 통해 전해지며,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지고 고쳐진 결과들이 도시의 현재 모습이 되었고 지금을 사는 이들이 살면서 그렇게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니, 아주 오래 전의 순간들과 현재가 겹쳐지는 순간들이 일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비례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은 만큼, 유럽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아, 그걸 비례라고 부르는 거군요?'라며 반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 비례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눈에 담고, 되새기며, 현인들이 일찌감치 남겨 놓은 훌륭한 자료들로 열심히 학습하면 되는 것이다. 창문의 비율은 가로 세로 몇 대 몇이 적당하고, 업무시설이자 고층건물의 경우 건물의 전체 비례를 상쇄하기 위해 입면 요소의 비례를 반대로 가져가기고 하는 등의 건축적인 비례의 경우 역시, 그저 시간과 함께 일하며 익숙해지면 되는 부분이다. 당연한 질문을 반문하고, 누군가는 학교에서 이미 배운 과정을 여기저기 캐묻고 다니는 일련의 순간들은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는다. 노력한 만큼 돌아와서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유럽의 건축 비례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동정심 어린 도움들을 얻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건축 외적인 부분의 비례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일상과 너무 가까워 본래의 개념과 혼동되는 비례는 사실 너무나 광대하고 다양했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부분, 일과 놀이, 취미와 특기, 연애와 결혼, 심지어 육아까지. 그중 가장 시급하게 익숙해져야 할 비례는 바로 '유럽에서의 삶'이었다. 야근이 없는 삶, 주말을 사적인 영역으로 지켜내는 삶, 공정한 결과를 추구하고 요구하는 과정까지. 주 40시간의 노동시간은 그저 태평하게 주어진 비례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라는 것까지 배워야 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노동절 행사가, 아마도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가끔 일상적인 비례를 뜬금없이 벗어나는 것들이 있다. 내부적인 기능 없이 의미만을 담기 위한 기념비적인 모뉴멘트(Monument)나 조각, 동상 등이 그렇다. 의도적인 순간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하기도 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 여느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일상의 반대편에 있다. 일상의 비례야 말로 더 그렇다. 어쩌다 한 번의 특별한 경험의 비례가 늘 일어날 수는 없다. 이직이라던지, 이사라던지,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일이 그렇다. 도시의 모뉴멘트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우리의 일상을 우리가 그렇게 특별히 이름 붙인 것이다. 흔치 않기에 더 특별하게 기억하려는 것일지 모른다. 집이나 사무실 등을 설계하는 일은 그래서 더 기억이 희미한지 모른다. 뮤지엄이나 콘서트홀 같이 흔치 않은 프로젝트에서의 비례가 그래사 더 강하게 기억이 남는 모양이다.


그러나 매일매일이 같게 느껴지고, 별일 없이 똑같은 하루로 생각되는 우리의 오늘은 사실 그렇지 않다. 아침마다 출근길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하루하루의 순간들은 모두 다르다. 그저 더 큰 도파민을 쫓듯이 더 강한 기억의 순간을 찾아다니려는 습성일지도 모르겠다. 맨날 보는 주차장 3대의 간격이 구조의 격자가 되는 기초 위에도 늘 보던 비례의 입면이 아니라 천차만별의 입면이 될 수 있다. 어느 특별한 장소의 특별한 프로그램의 건물이 아닌, 늘 지나다니는 곳의 늘 보던 아파트를 짓는 것이 특별한 이유는 아마도 그게 오늘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하던 걸로 하나만 더 하자는 사람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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