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마드리드를 떠날 때와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거처를 크게 옮기는 두 번의 상황 중에 더 드라마틱하고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로 가득 찼던 적은 단연 마드리드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갈 때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바르셀로나에서 일할 기회가 찾아 온건 ‘행운’이 가득했다고 설명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갈 때는, 이미 바르셀로나의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수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뭐 더 솔직해지자면 정말 그 사무실에서 일했었다는 것을 스스로 ‘팔아’ 자리를 만든 셈이었다. 그러니 누구에게 더 고맙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건 당연히 알베르또이다.
그러나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는 엄연히 ‘국내선’이었고 바르셀로나에서 베를린은 ‘국제선’이었다. 제법 먼 거리만큼이나 환경도, 날씨도, 사람도, 먹을 것도 많은 것이 달랐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나는 베를린에 아예 눌러 살 생각이 없었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 징검다리 식으로 1-2년 정도 거쳐갈 정도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스페인 생활이 불안했던만큼 항상 여차하면 한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젖어있었다. 한국은 항상 나의 잠재적 목적지였다. 베를린으로 향하며, 전혀 계획에도 없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도시로 짐을 싸며, 한국행이 더 옮은게 아닐까 많은 고민을 했었더랬다.
스스로 베를린에서 오래 살 것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가진 두려움의 다른 모습이었다. 독일어를 어떻게 배우나, 10명 남짓 하던 사무실에서 80명이 넘는 큰 사무실에서 대체 어떻게 일하나 등등 기억하면 하려 할수록 끝없이 나오는 잘잘한 고민들이 만든 억지 허상이었지 싶다. 그 잔챙이 고민들이 지금은 여기서 아이를 키우는 2019년 현실의 바탕이 되었다니 참, 여기서 다시 한번 삶이 알 수 없구나라고 깨닫는다.
가만히 보면 세상엔 아름다운 ‘이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나의 불완전한 눈으로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수도 있다. 그러나 ‘직장’이라는 공간이 ‘일’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공간, 혹은 조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얽히고 섥히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아름답기만 할 수 있을까. 다들 취미로 마음 편하게 일하면 안 그럴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최대한 ‘마지막 인사’는 좋게 하려고 노력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불만도 있었으며 뜻대로 안되는 것도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절이 맘에 안들면 중이 떠난다’는 말이 있듯이, 나도 내가 힘들어서 내발로 걸어나온 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직을 결심하게 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을 뒤로 하고도, 그래도 고마운 것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이 고마움의 표현이 ‘웃으며 좋게 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용인’와 ‘피고용인’의 처지, 혹은 ‘동료 피고용인’의 처지를 떠나서 말이다.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몇 주 전, 사무실 동료인 이삭(Isaac)과 라껠(Raquel)이 자신들의 고향 지로나(Girona)로 나를 포함해 직원 몇 명을 초대했다. 지로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기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시로 크지 않지만 풍부한 로마시대의 흔적 때문에 진기한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바르셀로나에 들르셨을 때 함께 가본 적은 있었지만 지로나 출신인 그 둘과 직접 걸어서 누비는 도시는 한층 멋스러움이 더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 도시 출신인 이삭과 라켈은 아르나우와 세실리아에 이은 두 번째 건축가 커플이었다. 아웅다웅하지만 둘의 합이 잘 맞았고 소탈하지만 속이 알찬 스타일의 까딸란(Catalán, 까딸루냐 지방의 언어를 지칭하기도 하고 이 지역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들이었다.
당시 한창 까탈루냐의 독립에 대한 뉴스거리가 많던 시절이었다. 주제가 뜨거웠던 만큼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도 독립에 대한 의견들이 엇갈리던 상황이었다. 확실히, 까탈루냐 ‘토박이‘들은 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컸다. 사무실에도 까탈루냐 지방의 언어인 ‘까딸란‘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한 번은 점심시간에 식사하며 노닥거리다가 내가 지나가는 말로 ‘내가 지금 까딸루냐에 살지만, 사는데 별 지장이 없는데 까딸란을 굳이 꼭 배워야 하냐’고 이야기했고 내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자 이삭은 껄껄 웃었다. 아마도 ‘어이없는 웃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출신 고장의 고유 언어를 까만 머리의 외국인이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정말 대인배와 같은 표정과 웃음으로 그 상황을 넘겼다.
바르셀로나 사무실은 스페인 각 지역 출신부터 이태리, 폴란드, 그리고 한국에 이르기까지 직원들의 출신 배경이 참 다양했다. 사실 좀 신기하기도 한데 이삭과 라껠은 그중에서도 제일 끝까지 카탈루냐에 남아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그 둘이 보기에 내가 스페인을 떠나는 것은 시기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이삭에게 인스타그램으로 친구 신청이 왔다. 보니 그들은 지로나에 그들만의 사무실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정말 뿌듯하기도 하고 왠지 쓸데없이 나의 목에도 힘이 들어갔다. 끝이 안 보이는 스페인의 경제 불황의 끝이라서기 보다 드디어 그들만의 ‘시간‘이 된 것 같다는, 기대하던 영화가 곧 개봉한다는 예고편을 본 기분이었다. 내 일상의 한 부분을 같이 했던 누군가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사람의 ‘인연’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스페인에 있었던 6년여간의 시간 뒤 나에겐 두 권이 책이 남았다. 하나는 마드리드를 떠날 때 페르난도와 크리스티나가 선물해줬고 밑의 책은 바르셀로나의 사무실 직원들이 선물해준 책이다. 라파엘 모네오 때문에 스페인에 와서 그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안고 스페인을 떠나려니 무언가 복잡 미묘했다. 스페인에서 이렇게 복잡한 시간들을 보낼 것 같았으면 그냥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사도 됐을껄 말이다.
그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스페인이 나에게 준 것은 많다. ‘건축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자양분을 나에게 아낌없이 주었으며 나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도 함께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에 덜 집착하게 해줬다.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겠다는 막연한 삶에 대한 자신감. 그것말고도 약간 느슨한 취미같은 것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 등등. 왜 그리도 건축에 집착하였을까하는 나에게 많은 가능성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스페인을 생각하면 혼자 ‘쓸데없이’ 애틋하다.
아주 먼 이야기지만 나는 은퇴를 하고 나면 스페인에 살고 싶다.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여유로운 날씨에 여유로운 시간을 살고 싶은 곳이다. 왠지 그래도 스페인은 여유로운 두 팔로 나를 맞아줄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