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취업 도전기 - 바르셀로나에서 베를린으로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눈이 펑펑 내리던 2014년 1월, 베를린에 면접을 위해 왔다. 1달여 전부터 연락을 주고받은 2군데의 사무실에 차례로 다니며 면접을 진행했다. 바르셀로나 일하던 사무실에는 새로운 사무실과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알리려던 참이었다.

그 날은 꽤 생생히 기억이 난다. 아니, 그 날은 더욱더 또렷이 기억하려 모든 순간들을 일부러 더 꾹꾹 눌러 담았다. 설명하기 힘든 '느낌'같은 것이지만 왠지 이 날은 나중에도, 추후에도 더 기억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산과 바다 사이의 격자 도시, 바르셀로나의 착륙 길은 참 예쁘다.

그도 그럴 것이, 실은 그보다 1년 앞선 2013년 초에 베를린의 다른 설계사무실에 면접을 봤었다. 굉장히 큰 사무실로 아시아, 미주 지역 할 것 없이 전 세계적으로 큰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하고 있는 곳이었다. 물론 독일어가 안되니 영어로 서류를 넣고 면접도 영어로 진행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면접 분위기는 좀 이상했다. 사람들은 '나'보다 내가 당시에 다니던 바르셀로나 사무실에 더 관심을 많이 보였다. 기업 스파이처럼 내부 사정들을 이야기하기 싫었던 나는 바로 월급 이야기로 넘어갔고 거기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며 면접은 바로 결렬됐다. 나는 정말 소박하게 불렀건만 그들은 금액 이야기가 나오자 나를 황당하게 멀뚱 쳐다봤다. 분위기가 갑자기 애매해졌었다. 더 치사한 것은 면접 뒤로 연락을 차일피일 미루며 명확히 면접 결과에 대해 통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나에게 일일이 이야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처럼 면접을 보러 다니는 입장에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나아질 것이 아닌가.

그 뒤로 난 한동안 '독일로 가려면 독일어가 필수다.'라는 슬로건에 꽂혀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스페인어를 6여 년 정도 배우고 난 뒤라 그런지, 내 인생에 또 다른 외국어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언제 또 그 과정들을 거쳐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말인가라는 식의 패배의식에 젖어가고 있었다. 결국, 나 스스로 가능성을 문을 닫았던 것이다.


그렇게 잠깐 이직을 실행하다 좌절한 나는 다시 일상에 몸을 맡겼다. 당장 더 나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일상을 계속 살은 것이다. 그러던 중, 전편에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털어놓은 '원형 탈모'가 나타났다.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이직을 미룰 이유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냥 '살기 위해' 그 상황에서 나와야겠단 생각밖에 없었다.

Barcelona-Pavillon / Mies van der Rohe / 1929 ©HK Shin

평소 가깝게 지내던, 베를린에서 학교를 졸업 후 설계 사무실의 다니던 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럼 자기가 다니던 사무실에 채용공고가 나와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마침 내가 갈 수 있을만한 자리에 사람을 구하고 있었고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나에게 하나의 '칼자루'가 생겼다. 그 사무실은 두 명의 소장 중 한 사람이 미국 사람으로 미국이나 외국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 그래서 나도 들어갈 만한 기회를 엿볼 수 있을만한 곳으로 보였다. 독일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거기에 현재 그 사무실에 다니고 있는 직원이 나를 적극 추천했으니, 별다른 문제는 있을 것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사무실의 가장 친한 동료였던 베레나도 베를린의 채용공고를 적극적으로 알아봐 줬다. 그녀는 독일어가 되니 내가 보지 못하고 접하기 힘든 정보들을 접하곤 했다.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자국어를 영어로 모두 번역해 제공하지 않는 사이트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서 베레나가 채용공고를 하나 또 찾아줬다.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프로필이었다. 뮌헨의 사무실에서 일할, (이 사무실은 베를린뿐만 아니라 뮌헨에도 사무실이 있었다.) 경력 5-8년 차의 프로젝트 매니저 급을 구하는 채용공고였다. 베레나는 일단 사무실이 괜찮으니 뭐가 됐던 일단 넣어보라 했다. 뭐 이런 맨땅에 헤딩식의 지원서는 내 전문이기도 했으니 영어로 되는 대로 적어 이메일을 보냈다. 생뚱맞게 얼마 후 베를린 사무실의 인사 담당자가 나에게 메일을 보냈다. 나중에 들어보니 뮌헨으로 보낸 나의 지원서를 베를린이 더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베를린 사무실로 내 이메일을 '전달'해 준 것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2개의 사무실에 면접 날짜를 잡게 됐다.


비용절감을 위해 면접을 하루에 몰고 시간 차이를 벌려놨다. 한 번 실패한 뒤의 베를린이라 신중하고 싶기도 했고 고민할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엔 뭐가 됐던 진짜 돼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Ciutat de la Justícia /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 2002- 2011 ©HK Shin (참고로 글의 내용과 상관없음,)

면접은 다행히, 별 어려움 없이, 많이 당황하지 않고 잘 끝났다. 도리어 면접이 끝난 뒤 면접의 결과를 기다리는 보름 정도의 시간 동안이 정말 힘들었다. 마음이 들뜨기도 하고 집중도 잘 안되고 딴생각이 많아지며 초조하기도 했다.


유리할 땐 '에이 그래, 가긴 어딜 가. 여태까지 여기서 일한 시간이 있는데 그냥 있지 뭐.'


불리할 땐 '왜 이리 연락이 안 오지? 내가 또 뭐 실수했나? 아 이번에도 안되면 또 다른데 알아봐야 하나? 어떻게 하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이 격해질 즈음, 그러니까 면접 뒤 2주 정도 시간이 지나 최종 제안을 담은 이메일이 도착했다. 두 회사가 신기하게도 하루에, 몇 시간 간격으로 메일을 보냈다. 두 번째 메일까지 확인한 뒤 너무 좋은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장실에 가서 묵음으로 허공에 팔을 흔들며 쾌감을 느꼈다. 왠지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월급이 대단하게 뛰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로 계약서에 그걸로 비자도 받고 세금도 내는, 드디어 '사회적 투명 인간'의 신세를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너무 중요했다.


바로 베레나와 이 소식을 나눴다. 그리고 1달 정도 후에 나의 이직 계획을 사무실에 알렸다. 소장이었던 알베르또는 어디로 가는지 물어봐도 되냐고 조심스레 물어봤고 다른 소장이었던 파브리찌오는 내가 가는 사무실 욕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는 것도 좀 신기했다. 나 역시 그런 자리에 있었던 것이 첫 번째 기억이기 작은 순간들도 기억에 아주 많이 남는다. 그러나 저러나 그 자리에 있던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비자도, 계약도, 어느 보험도 없는 인디애나 존스와 같은 모험이 가득한 삶은 유한하다는 것을.


일이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진행되어 가는 동안, 이 글을 쓰는 지금처럼 그때의 순간들을 곱씹어 볼 시간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기에 그만큼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았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다. 거기에 스페인을 떠나는 아쉬움, 독일로 떠나는 두려움 등으로 마음엔 여유의 공간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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