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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Feb 28. 2024

슬퍼도 울지 못하는 마음

슬픔을 마주하기

얼마 전 '개모차'의 판매량이 유모차를 추월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애견 전용 미용실에서부터 유치원과 호텔까지 바야흐로 신흥 반려동물의 시대를 맞이했다. 애견이 가족 구성원이 되어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말속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MZ세대가 사용하는 신조어로 '개웃겨' '개멋짐' 등은 말머리에 '개'를 붙여 뭐든 강조하는 의미로 다. 이전 세대들이 신박하고 대단한 것에 붙이던 '짱'이나 '대박'의 자리를 당당히 이어받고 있다. 이러한 개를 사용한 말하기는 선조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속된 말로 처참히 깨지는 '개박살'과 아무런 보람이나 가치가 없는 '개죽음' 등은 주로 비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음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죽음' 또한 무심코 쓰는 말속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연륜이 지긋한 노인들이 거리에서 말을 나눈다. '결혼 전에 내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단 사람이, 결혼 후에 나 때문에 죽을 것 같다네' 죽을 것 같다는 말은 '못살겠다'는 마음의 저항감을 대신 나타내기도 한다. 노인들에게 죽음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 차례를 기다리는 이에게 '죽음'이란 굉장히 생경한 단어일 것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구에게나 죽음은 사고처럼 날아든다.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한 날 것 같은 슬픔에 익숙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연말이 되면 '울면 안 돼'라는 캐럴이 길거리를 울려온다. 한 해 동안 울지 않고 꾹 잘 참은 아이에게 보상처럼 선물이 찾아간다. 때론 눈물이 헤픈 이에겐 '울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울면 불운이 온다는 사실을 당부한다. 더욱이 진정한 어른이라면 울면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요즘은 슬퍼도 울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있다. 실제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고 꾹 참게 되는 '민모션 증후군' 있다고 한다. 어릴 적 아기가 울면 엄마는 달려가 아기의 울음을 읽어주는 행위를 한다. 울음은 문자가 아닌 소리로 되어있어 그 뜻을 알기 위해선 속을 들여다보고 해석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충분히 타인들의 울음을 읽어주고 있는 걸까.


종종 지인이나 직장 동료 가족의 부고소식을 듣곤 한다. 그럴 때마다 상실에 대한 경험이 적고 애도를 배워본 적 없어 곤란할 때가 있다. '시간이 힘이다', '다 잘될 거야' 등 힘내라는 말로 서둘러 슬픔을 종용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회피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애도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몰라서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렇기에 슬픔은 더욱 고립성을 띤다. 우리는 슬픔에 '빠진다'라고 한다. 깊고 어두운 구덩이나 나락 속에 빠진 듯 어찌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슬픔이란 기침을 하듯 참을 수 없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다. 슬픔 또한 인간이 느끼는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이다. 그러한 감정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건 아마도 슬픔의 성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만난 소나기에 잔뜩 젖어드는 것처럼 슬픔은 다른 감정을 우울로 적신다. 슬픔이란 감정을 처리하는 일은 비에 젖은 무거운 코트를 입고 혼자서 진흙탕 속을 헤쳐 나오는 과도 같다.


가끔 TV에서 슬픔에 빠진 인물이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행동을 보여준다. 슬픔은 또한 신체적 고통을 동반한다. 실제로 실연이나 상실 후에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을 느낄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몸이 대신 울어준다'라고 한다. 기쁠 때 손발이 저릿하며 간지러운데 반면 소름 끼치는 상황에선 등골이 오싹하기도 한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으면 가슴이 메어지거나 고도가 높은 곳에선 오금이 저리기도 하다. 감정은 마음속에만 있지 않다. 감정은 우리의 몸 곳곳에서 오장육부와 근육과 피부로 함께 숨 쉰다. 지금껏 말로만 전하던 애도가 힘이 없었던 까닭도 이와 비슷하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할 때 위로는 배가 된다. 만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친구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준다면 좋을까. 말없이 함께 울어주거나 곁에서 온기를 채워준다면 좋겠다. 고갈된 마음을 누이고 쉴 수 있는 배려와 따스한 눈빛으로 안아주면 어떨까. 거짓된 말을 부풀려 애써 위로하려 하지 않고 함께 고인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스무 살 꽃 같은 나이에 교통사고를 만나 전신 화상을 입은 이지선 이화여대 교수는 자신을 '난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라 말한다. 그녀는 사고를 '당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만났다'라고 본다. 사고를 당했다는 건 평생 불운한 피의자로 남겠지만 '만남'이라는 건 '헤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의 슬픔을 재해석함으로써 '결과'가 아닌 '과정의 단면'으로 받아들였다. 슬픔을 이겨냈다는 자긍심과 새로운 행복의 엔딩을 향해 가는 여정을 우리는 '승화'라고 부른다. 누군가에게 슬픔은 깊은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고통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배움이 되기도 한다. 부모가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아기에게 달려가 울음을 읽어주듯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슬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슬퍼도 울지 못하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다가가 살펴보려는 작은 마음 애도의 시작일 것이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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