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적으로 거리를 둔다는 것
<연극적 거리두기>는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위기에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지원금을 주고자 마련된 일종의 공모전에 제출한 기획이었다. 금지되거나 유보되거나 대체된 '만남'이라는 것에 대해서, 만날 수 있을까 만나지 못할까,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만남'의 시도를 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한정된 짧은 기간에 다소 급하게 시작 및 완성됐었다. 그것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사실상 신조어인 '비대면'이라는 발명품의 오용과 남용으로 비롯된 답답한 현실에 저항하고자 함이었다. 어쨌거나 결과는 그렇게 거창하거나 통쾌한 것은 아닌 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결과의 의미가 무엇일 수 있을지에 대해선 종반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다.
팬데믹이 시작되자 '비대면'이 유행처럼 번지며 그것이 마치 무조건적으로 '대면' 또는 '만남'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 '뉴 노멀'이라도 되는 양 온 사회의 풍경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거기에는 심각한 전염병의 유행을 막기 위한 불가피함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비대면이라는 단어 하나가 팬데믹 이전의 만남의 가치를 모조리 새로운 규범의 (비)만남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함이, 만남이라는 것이 필수적인 분야에서조차 고민 없이 행해지는 풍경은 참으로 부조리한 것이었다. 여러 분야의 종사자 및 사기관들은 물론 정부조차 '대면'의 양식을 과학적이거나 창의적으로 조정하려 하기보다는 '대면'을 '비대면'으로 단순 치환하고는 그로 인한 손실과 결여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체념하고 모른척하는 다소 무책임한 모습들을 보였다. 정부 부처 또한 처음 겪는 대재난일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야 될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그 행태의 원인이 전염병에 대한 대처 경험 부족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원래 하고 있던 일들에 대한 철학 부족으로 보였다. 대면과 비대면이 서로 반대말이라는 사실을 뭉개버리는 현실은 우리 사회에 번진 또 다른 패닉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유림은 그해 전년도부터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양동초등학교를 비롯한 몇 군데의 학교에서 연극 수업을 진행해왔고, 코로나 유행이 시작되자 몇몇 학교는 수업이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다. 다만 양동초등학교에서는 연극 수업을 비대면으로 전환했는데, 교사가 PPT 기반의 동영상 수업을 만들어서 학교를 통하여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유림은 당연히 난관에 빠졌다.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서로 호흡하며 서로의 마음과 생각뿐 아니라 몸까지 접촉해야 가능한, 아니 어쩌면 그 접촉들이 본연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연극 수업을 동영상 수업으로 만들라니. 유림은 어찌어찌 그렇게 연극 수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연극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는 터였다.
그 조촐한 PPT 프레임이 이 기획의 무대였다. 연극에 대한 PPT 안에서 영상이 재생되면 한적한 양동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방역복으로 꽁꽁 무장한 유림이 등장하고, 동네를 누비며 아이들을 만나고자 한다. 사실 촬영 준비 단계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놓지 않았었고 어쩌면 그것은 이 기획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아마도 아이들을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고 또 그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못 만남을 기대한다라? 그것은 내용과는 전혀 반대되는 의도였지 않은가?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기획의 내용에서 결말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만나면 무엇을 할지, 혹은 만나지 못하면 무엇을 할지. 그런 것들을 정해놓지 않고 실망스러우면 실망스러운 대로, 놀라면 놀라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대처'하자는 마음이었다.
결국 어쩌다 정말로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그다지 극적으로 연출되진 못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이 마구잡이로 내뱉은 말들을 주어 담고, 영화는 마치 자신이 한 편의 연극일 수 없는 연극이라도 되는 양 유림의 커튼콜 인사로 끝이 난다. 그것들 모두는 아주 자연스러운 연결이나 마침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어쩌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만남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제 우리 시대에 '만남'의 의미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만남이 랜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거나 시차를 두고서 이루어진다거나 가상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류의 기술 발명품 주도의 패러다임 전환, 즉 "이렇게도, 저렇게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이것도, 저것도 이제는 모두 만남이에요" 따위일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대신, 예상컨대 저런 소위 패러다임 전환을 지나치게 과신한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그저 '만남' 안에서 어떤 답답함을, 어떤 불확신을 느낄 것이다. 또한 만남을 언제나 의심하고 경계할 것이다. 그것이 대면 만남이든 비대면 만남이든 가상현실 속에서의 만남이든, 그리고 팬데믹 이전 형태의 만남이든 말이다. 만남의 의미를 바꾼 것은 서로 간의 접촉을 먹이 삼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팬데믹을 기회 삼아 출현한 의사pseudo 만남들이다. 마치 동영상으로 촬영, 편집된 vod 연극을 연극 공연장 객석에 앉아서 무대 위에 홀로 펼쳐진 스크린을 통해서만 보고 난 후, 저 스크린 위에서 커튼콜 인사를 건네는 이미지로서의 배우들을 향해 박수를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것처럼, 우리는 더 이상 만날지 말지를 망설이지 않고 그저 만남 앞에서 망설일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실상 우리들 사이의 거리를 무화시켜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신에 우리가 우리 삶에 연극을 더 요청한다면, 우리는 없어져버린 '거리'를 우리들 사이에 말 그대로 '둘' 수 있을 것이다. 연극적으로 거리를 둔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편, 여기서 다룬 팬데믹 시대의 '만남'에 대한 회복적 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영화라는 것은 무언가를 직접 만나지 않고도 만날 수 있는 어떤 시간을 탐색하거나 기다리는 예술이기도 하다. 그를 위해서 나는 다소 역설적이지만 (영화적/영화 외적) 만남의 불가능성을 믿는, 그 믿음에 기대는 또 다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연극적 거리두기>의 극적이지 못한 만남 사이의 연관성은 다만 아직 확신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