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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Jun 03. 2018

한 끼: 생애 최대의 고민

직장인들이 오늘 점심 뭘 먹을지 고심하고 전업주부들이 저녁 메뉴를 걱정하듯, 여행자인 나도 매 끼니 때면 "오늘은 또 뭘 먹어보나" 중얼거렸다. 늘 먹던 음식을 고를 수도,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메뉴를 당장 먹을 수도 없었다. 나는 매번 새로운 도시에 있었으니까. 밥을 먹을 때마다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하나 검색하고 발품을 팔아야 했다. 한국에선 맛볼 수 없었던, 아니 때로 들어본 적도 없었던 음식을 찾아다닐 수 있어 즐거웠지만 그걸 매일 해야 해 괴롭기도 했다.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 해도 약 6개월 간 360번의 밥을 먹었을테니 아마 그만큼 식당을 찾기위해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보통 여행자들이 추천하는 식당을 찾고, 거기에 게스트하우스 직원들이 추천하는 맛집을 추가해 나만의 맛집 리스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식사 시간에 리스트에 있는 식당 주변에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배고픔에 짜증지수가 올라가기 전 어딘가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여러 식당을 돌며 메뉴판을 정독하고 레스토랑 동태를 살피며 한참 탐색의 시간을 가진 뒤에야 식당 하나를 고르곤 했다.



완벽한 한 끼      


로마의 5월은 더웠다.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 여기 저기 누비고 다닌 몸은 저녁엔 걸을 의지를 상실한 상태가 됐다. 빨리 저녁을 먹고 들어가 샤워하고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걷고 걸어도 P군이 평이 좋다며 검색해온 레스토랑은 나오질 않았다. 가는 길에 식당은 커녕 불을 켜 놓은 가게조차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식당을 찾아 20분 정도를 더 걸었다. 보이는 곳 아무 데나 들어가고 싶어도 그 아무 데도 없는 상황. 짜증낼 힘조차 사라졌을 즈음 한적한 골목에서 불을 환히 밝힌 레스토랑을 만났다.


생각보단 작은 식당이었다.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짜증이 조금 누그러 들었다. 무엇을 먹어야 할 지 몰라 낯선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을 떄 주인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로마의 까르보나라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달걀로 비벼 먹는 거야.” 이어 "우리 식당에선 공장에서 만든 건 안 써. 다 주변 농장에서 만든 것들만 가져와서 요리해"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선 자부심이 느껴졌다.


고심 끝에 까르보나라와 씨쉘 파스타를 주문했다. 말했던 대로 크림 국물 자작한 파스타 대신 노른자 얹어진 까르보나라와 비릿한 국물이 끼얹어진 조개 모양 파스타가 나왔다. 한국에선 먹어본 적 없는 파스타였다. 양이 많지 않아 포크질 몇 번에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뭘 더 주문해야 하나 고심하는데 테이블을 지나가던 주인아저씨는 "로마에선 남은 까르보나라 소스를 빵으로 찍어서 다 먹어. 로마 방식이지. 원한다면 빵을 좀 더 가져다줄게"라고 툭 말을 뱉었다. 식전 빵조차 유료인 곳이 많아 바로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호의로 느껴져 고맙다고 해버렸다. (그 빵은 공짜였다!!)


조언대로 그릇에 남은 소스를 빵에 찍어 싹싹 비우고 식당을 나섰다. 문 앞엔 주인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그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며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검색을 잘못한 듯했다. 주인 아저씨의 귀여운 실수) 대화 중에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묻더니 급히 찾아본 모양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P군과 식당 얘길 했다. 처음 먹어본 파스타 맛, '로마식'이라며 식사 방식을 알려주던 아저씨, 식재료를 주변 농장에서 가져와 요리한다는 철학, 아늑한 가정집 같았던 식당 내부 인테리어 그리고 마지막 인사에 대해 하나씩 곱씹었다.          



@까르보나라 사진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최고의 한끼


칠레 발파라이소 마지막 날엔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한참 기다려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빗속을 뚫고 파블로 네루다의 집으로 향했다. 시내를 내려다보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라 들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건 먹구름 뿐이었다. 관람을 마치고 흠뻑 젖은 채 추위에 떨며 점심 먹을 식당을 찾아나섰다. 유명 관광지지만 일요일이라 주변 식당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고 싶었지만 차가 없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할 수 없어 택시를 찾아 걸어가고 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식당 찾니? 여기 가봐"라며 우릴(나와 일행 두 명) 이끌었다. 창고처럼 생긴 건물 문 앞에 우릴 데려다놓고 그는 유유히 사라졌다. 미심쩍었지만 잠시 비라도 피하겠단 심산으로 문을 열었다. 예상 밖에 근사한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건네며 지배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음식값이 비쌌다. 다음에 오겠다는 말 대신 (한국에서라면 하지 못했을) 너무 비싸 먹을 수 없다고 말하며 돌아섰다. 비에 발이 묶여 당장 갈 곳을 못 정하고 문 앞에서 머뭇대고 있는데 지배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얼마를 낼 수 있는데? 이렇게 비가 오는데 너희를 보낼 수 없어. 휴먼 빙(human being)으로서 그럴 수 없지. 다른 곳은 다 닫았을 거야.” 그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보였다. 무슨 말인지 한번에 이해되지 않아 한국말로 우리끼리 대화를 나누자 그는 “메인 요리에 음료수, 디저트 해서 5000페소(만원 정도) 면 되겠어?”라고 제시해왔다.      


남미였다. 늘 변수와 약간의 사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이미 지친 우리는 비를 맞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일단 믿어보기로 하고 따라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약속한 대로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생과일 착즙 음료와 식전빵 그리고 로컬 피쉬로 만든 요리 그리고 마지막에 이름 모를 디저트까지. 신나게 먹으면서도 "혹시 나갈 때 돈 더 내라고 하는 거 아니겠지?” 의심을 이어갔지만 그는 우리가 나갈 때 환한 미소를 보이며 약속한 돈을 만큼만 받았다. 이곳에 대한 트립어드바이저 평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날 우리에겐 최고의 식당이었다.        


   

@만원으로 즐긴 코스 요리



눈 감고 즐기는 한 끼     


“언니, 볼리비아에선 길거리 음식 사 먹으면 안 된대.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먹고 배 아팠다고 조심하라고 하더라.”     


우유니에 도착했다고 하자 같은 시기 남미를 돌고 있던 친한 동생이 말했다. 모로코 마라케시에서도 비슷한 얘길 들었다. 위생에 대한 기준이 우리와 달라 그들의 설거지는 사용한 접시와 수저를 물에 담갔다 빼 마른 수건으로 닦는 게 전부이니 노점에선 음식을 먹지 않는 게 좋다고 사람들이 얘기했다. 사실 그곳에선 위생보다도 호객행위에 질려 광장을 가득 메운 노점을 스쳐가기만 했다. 겨우 유명한 오렌지 주스만 한 잔 사먹었을 뿐. 찝찝한 기분에 돈을 좀 더 내고 유리잔 대신 일회용 잔을 이용했다.


처음엔 우유니에서 관광객을 위주로 하는 식당에 찾아갔다. 이탈리아 파스타와 비교 하면 안 되지만 그곳의 파스타는 맛도 없고 가격도 비쌌다. 이후 기대감을 갖고 한국 여행자들 사이에 '김치볶음밥'(과 비슷한 음식)을 팔아 유명한 음식점에 갔지만 짜기만한 정체모를 음식을 반도 채 먹지 못하고 물만 잔뜩 마시다 왔다.


몇 번 실패 후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껏 물갈이를 하거나 음식을 먹고 탈 난적이 없으니 여기서도 그러겠지.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초리소(양념된 소시지) 굽는 향이 자욱한 골목을 만났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현지인들 가운데 관광객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손짓과 눈치로 이용법을 알아듣고 초리소를 기다리며 셀프바에 준비된 샐러드를 가져다 먹었다. 가격은 전에 갔던 곳의 절반도 되지 않는데 훨씬 맛있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나왔다.  


이후 좀 더 과감해졌다. 소금사막 투어 후, 무료함에 동네를 다니며 노점 음식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저녁시간엔 보이지 않았던 학교 앞 노점을 돌며 엠빠나다, 감자에 샐러드를 얹어준 이름 모를 간식 등을 하나식 맛보며 산책을 이어갔다. 걸음은 시장으로 이어졌다. 과일이나 사볼 요량으로 안으로 들어갔으나 문을 닫을 시간인지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여기 저기 기웃대다 사람들을 따라 문밖으로 나가자 짧은 골목에 음식 파는 노점이 줄지어 있었다.



감자와 고기, 밥을 볶아서 한 데 담아주는 게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힐끔 보며 지나치려는데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을 보자니 회가 동했다. 망설이다 한 그릇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신경 쓰지 않으려 신경 쓰는 스스로를 의식하며 한 수저 크게 넣었다. 최대한 숟가락이 입에 닿지 않게 노력하면서. 고기와 파실한 감자와 밥의 조합은 맛이 없을 수 없었다. 가격도 몇 백원 남짓.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가끔 뉴스에서 특급 호텔들도 위생상태가 불량하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는가. 내 눈 앞에서만 그러지 않는다면 다 괜찮다.



@사진 찍어도 되냐는 얘기에 얼굴은 빼고 음식만 찍으라며 할머니가 한 발 뒤로 물러나 주셨다.



여유 있는 한 끼     

 

가정집 느낌의 호스텔 주방이 북적였다. 나는 채소를 썰고, J 씨는 닭을 삶았다. 또 다른 J 씨는 냄비밥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바릴로체에서 만나 산마르틴까지 동행한 이들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J 씨가 닭볶음탕 양념을 꺼내 들었다. 자연스럽게 메뉴는 닭볶음탕이 됐다. 처음 해보는 요리였지만 능숙하게 해내는 J 씨를 도와 분주히 움직였다. 산마르틴의 첫 저녁 상엔 콘소메 스톡이 들어간 닭 요리와 한국식 닭볶음탕 두 가지가 올라왔다. 익숙한 맛과 창의성을 발휘한 새로운 맛이 조화를 이룬 밥상.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조식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빗방울이 굵어져 십 여분 만에 돌아왔다. 각자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 함께 점심을 만들었다. 전날 남은 닭볶음탕 양념엔 밥을 볶고, 콘소메 국물엔 바릴로체에서 해 먹고 남아 들고 온 라비올리를 넣어 끓였다. 칼라파데에서 만난 한국 여행자에게 선물 받아 고이고이 모셔두었던 깻잎과 멸치 통조림도 식탁에 올랐다. 먹는 내내 연신 감탄이 이어졌다.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가기 전까진. 저녁엔 아르헨티나에서 빠질 수 없는 소고기를 굽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우리 여기 진짜 먹으러 온 것 같아요” “나가서 사 먹는 게 더 싸지 않았을까요?”라고 깔깔대면서.           





*여행자의 추천 식당      


-이탈리아 베니스 ‘폰티니’

-이탈리아 로마 ‘Il nido del Pettirosso’

-폴란드 바르샤바 ‘Jaś & Małgosia’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사도 모임’

  :여행 중인 한국인들끼리 아르헨티나 전통 바비큐를 즐길 수 있게 현지 교민이 주선하는 자리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Alber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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