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ak Jun 10. 2018

친절: 진짜와 가짜

여행 중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낯선 곳을 헤맬 때면 지나가는 이들이 흔쾌히 내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목적지까지 동행해줬다. 지도를 들고 있기만 해도 “도와줄까?” 물어오는 이들, 낑낑대며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 기꺼이 힘을 보태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미소와 “Thank you"란 말 뿐이었지만 상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가던 길을 갔다.

     

몇몇 국가에선 당연한 듯 여겨졌던 친절의 ‘대가’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어디까지가 선의고 어디부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서비스일까. 늘 동아줄처럼 반가웠던 “도와줄까?”란 말이 모로코에선 경계와 귀찮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도와줄까?” “어디 찾니?”란 질문이 진짜 친절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로 같은 페스의 메디나(구시가지) 골목에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테너리(가죽 염색하는 곳)는 이쪽으로 가야 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련이 된 덕에 보통 못 들은 척 지나가거나 앙칼지게 “No"라고 답하곤 했다. 그러나 가끔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 조건반사처럼 ”Thank you"라고 말이 나왔다. 그 순간, 난 미끼를 문 꼴이 되었다.      


@모로코 페스 '테너리'


실체를 드러낸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디서 왔니” “모로코는 처음이니” “어디에 묵니” 등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마치 자기 갈 길을 가는 사람처럼 조금 앞장서 걷는 이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응수할 수도 없었다. 찜찜한 기분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던 게 이거구나’란 확신으로 바뀔 때면 떼어내길 포기하고 지갑 속에 10 디르함 짜리가 있는지를 생각했다. 10 디르함에 개인 가이드를 고용한 셈 치고 그때부터 설명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 친절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설명했고, 골목을 지나가는 당나귀에 눈길을 주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줬다. 셀카를 찍는 것 같으면 알아채고 카메라를 달라고 하는 센스까지. 헨젤과 그레텔처럼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놓지 않으면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골목길에서 어차피 혼자선 길을 찾지 못했겠지, 예상치 못한 지출을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들과 걸을 땐 아무도 내게 말을 건네지 않는 편안함도 누릴 수 있었다. (이곳의 상도덕인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들은 본래 목적을 내보였다. “음. 근데 혹시 내가 민트티나 한 잔 마실 수 있게 좀...” 대부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머뭇대며 내가 돈을 내밀면 군말 없이 “슈크란(감사합니다)”하고 감사를 표했다. 그리곤 돌아가는 날 걱정해줬다. “언덕을 내려가면 메디나, 올라가면 출구. 여기선 이것만 기억하면돼. 다른 사람들이 말 걸면 대답하지 말고 걸어가.”      


그 정도라면 친절을 가장한 ‘영업’에 돈을 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딱 한번 팁을 더 내놓으란 협박을 당했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와 동행했던 이탈리아 친구와 팁으로 각각 10 디르함씩 내밀자 가이드(를 자처했던 이) 얼굴이 굳어졌다. “10 디르함? 이거 1유로야. 알아?”라며 돈을 든 손을 우리 얼굴 쪽에 대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사진을 찍는 우리에게 써보라고 자신의 모자를 건네줄 때의 사람 좋은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길에서 우리어게 좋은 곳이 있다며 데려온 그였다. 가고 싶었던 곳도 아니라 줬던 돈마저 도로 뺏고 싶었지만 해코지가 무서워 “이 이상은 줄 수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혹여 뒤를 쫓아올까 무서워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한참 동안 앞만 보고 걸었다.



@가이드 덕에 찍은 당나귀와 그를 따라 가서 마신 민트티. 이 가게도 그의 친척이 하는 곳이었지만 가격이 비싸지 않아 애교로 넘겼다.
@가이드(?)가 전망대에 데려가 준다며 데려 간 곳. 비좁은 골목을 헤메다 탁 트인 곳에 오니 속이 뻥 뚫리는 듯 했다.



파란 도시 쉐프샤우엔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BGM처럼 들리던 “니 하오” “곤니치와” “치노?” (아주 가끔) “안녕하세요” 폭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들이 유령인 것처럼 길을 지나갔다. 가끔 “나쁜 사람”이란 말이 뒤에서 들릴 때면 돌아가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길에서 전통과자를 사 먹으려 기다리는 중에도 어김없이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놀러 왔어? 어디서 왔어?” 꽤 유창한 영어였다. 옆을 힐끔 보고 잔뜩 경계한 표정으로 한 발 물러나자 그는 “난 팁을 원하는 게 아니야. 그저 영어 실력을 키우고 싶을 뿐이야. 너 영어 할 줄 아니?”라고 물었다. 처음부터 팁을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간식이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는 상황. 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여기가 내 고향이야. 지금은 다른 도시에서 공부하고 있거든. 어릴 적 친구와 오랜만에 놀러 왔어.” 대게 그가 말을 했고 나는 추임새만 넣었다. 음식이 나와 계산하려는데 그가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내 것까지 계산했다. 그리곤 스페인 모스크에 석양을 보러 가는데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면 프레임 안으로 장난스럽게 뛰어들던 이들. 한 명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해 함께 하는 내내 그가 신경쓰였다.


그들을 따라나섰다. 평소와 다르게 믿음이 갔지만 경계를 풀 순 없었다. 계속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렸고, 유사시 도망갈 수 있게 두 걸음쯤 거리를 계속 유지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동안 누구도 내게 “니하오” 말을 걸지 않았다. 골목을 헤매지 않고 금세 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는 입구 옆 계곡을 보며 라마단(이슬람력 9월·해가 떠있는 동안 금식하는 기간)이면 더위와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이 바위를 빼곡히 채우고 누워있다는 얘길 들려줬다. 산을 오를 땐 양옆에 곧게 뻗어 있는 나무 이름을 알려주고 열매를 따 내게 건넸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 안심하고 걸었지만 ‘이 정도 설명이면 팁을 얼마나 줘야 하지?’란 생각은 계속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언제 갑자기 연극 대사처럼 준비된 말을 쏟아낼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아 근데 혹시 아르간 오일은 필요 없니? 내 친척이 오일을 파는데 싸게 해줄게” 아니면 “투어 생각 있어? 삼촌이 메르주가에 계셔. 내 친구라고 하면 잘해주실 거야” 그도 아니면 “가죽 가방은 안 사? 친구들한테 선물하면 좋아할 텐데” 같은 것들.      


산을 내려와 그는 팁 요구 대신 저녁 식사 제안을 했다. 대번에 거절하긴 왠지 미안해 고심하다 차를 마시기로 했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 설탕을 잔뜩 넣은 민트티로 몸을 녹였다. 그는 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호주 양부모님이 계시고 (어떻게 양자가 됐는지 그가 설명하려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영어 실력을 키워 호주에 오면 좋겠단 얘길 하셔서 호주에 가서 사는 걸 목표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대화 중 그가 정확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끙끙댈 때 알려주면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 단어를 두세 번씩 반복해 읊조리곤 했다.      



@스페인 모스크와 그곳에서 내려다본 풍경. 함께 한 두 친구를 찍어준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보내주지 못해 마음에 걸린다.


다음 날 점심 때도 그들을 만났다. 낯선 이들과의 동행이 불편했지만 친절했던 그의 제안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그들과 간 곳은 간판 없는 로컬 식당이었다. 콩으로 만든 모로코 전통 스프와 빵을 먹었다. 호스텔 근처라 여러 번 지나쳤지만 음식점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기만 했던 곳이었다. 호스텔에선 이곳 말고 바로 옆 레스토랑만 추천해줬다. 거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그곳도 맛있었지만 이곳에 비하면 좀 비쌌다)      


밥을 먹고 나와 전날 얘기했던 관광지에 가자고 길을 나섰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 찜찜함에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혼자 여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라고 말을 꺼냈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악수를 청했다. 돌아서는 내게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어 줄 뿐, 마지막까지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영어를 배우고 싶어 나와 대화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과 그때까지 보여준 선의가 진짜였음을 믿게 됐다. (왜 동양인인 나를 택했는지는 의문이다)     


함께 있을 땐 ‘의심병’ 탓에 반쪽짜리 감사만 표했다. 입으로 고맙다고 말하면서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머릿속으로 여러 가질 생각했다. 사실 모로코에서 만난 모든 이들에게 그랬다. 메디나에서 길을 헤맬 때 조용히 손가락을 길을 알려준 상인들, 말이 통하지 않아 아이스크림 노점 앞에서 막막해할 때 해결해준 할머니(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랍어로 말했지만 그녀와는 대화가 됐다!!), 불어도 스페인어도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하며 숙소를 찾아주겠다고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려준 경찰들… 나는 늘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그들의 행동이 ‘친절’이었음을 깨달았다. 다시 돌아가 “고맙다” 말할 수 없기에 그들 모두에게 더 고맙고 미안했다.





이전 08화 한 끼: 생애 최대의 고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