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뜬 레이캬비크 시내를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 모델명이 궁금하다고 물었다. 짧은 대화는 통성명을 거쳐 긴 대화로 이어졌다. 이스라엘 출신인 그는 3년째 이곳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이라고 했다. 축제 속을 함께 걸으며 그는 가이드처럼 도시 곳곳을 소개해주었다. 간간이 질문도 던지면서.
“아이슬란드엔 왜 온 거야?”
“오로라 보러 왔어. 근데 날씨가 안 좋아서 힘들 것 같아.”
“가끔 예상치 못하게 운동하러 가거나 슈퍼 갈 때 몇 번 봤는데, 나도 아직 녹색 오로라 밖에는 못 봤어. 가기 전에 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아이슬란드에는 언제까지 있어?”
“28일까지. 더블린으로 돌아갔다가 폴란드에 갈 거야.”
“폴란드는 왜 가는데?”
“아우슈비츠에 가보고 싶어서”
“음. 우리 할머니가 거기 계셨었는데”
그 순간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떻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멍해졌다.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유럽 도시를 걸으며 종종 홀로코스트를 마주했다. 글래스고 박물관에서 ‘우리와 직접 관련 없게 느껴져 왜 알아야 하나 생각하겠지만, 우리도 이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홀로코스트를 다룬 전시를 보았고, 부다페스트에서 워킹투어 중 골목을 걷다 게토 지대를 만나기도 했다. 유럽 여행 중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될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도시들을 만나며, 나 역시 거리가 먼 '역사적 사건'으로만 여겼던 홀로코스트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해 아이슬란드에서 만났던 그의 할머니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과연 그녀는 끝까지 견뎌 이곳에서 걸어 나갔을까. 옷을 다섯 겹이나 껴입고 털부츠를 신어도 온몸을 때리는 바람에 덜덜 떨게 되는 이 겨울. 홑겹 옷을 입고 나무 신발(clog)을 신은 채 언 땅을 파고 진흙에 들어가 일해야 했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추위, 배고픔, 고문과 가스실 공포에 맞서야 했을 이들의 삶이 수용소 곳곳에서 그려졌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가스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수용소 여성들은 샤워를 하게 해준다는 말에 옷을 벗고 밀폐된 공간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이미 들어 알고 있었을 가스실의 존재.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던 여성들의 얼굴은 샤워기에서 진짜 물이 뿜어져 나올 때 미소로 바뀌었다. 살아남았다! 죽음의 공포는 늘 그들을 따라다녔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찾아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아 보이는 삶이었다. ‘이러한 삶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는 편이 나았던 걸까.’ ‘과연 그들이 희망이란 걸 가질 수 있었을까.’ 모니터를 통해 그들 삶의 일부만 바라보던 나는 잊고 있었다. 그들에겐 살아서 만나야 할 가족과 돌아가야 할 ‘원래 그들의 삶’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쉽게 삶을 포기해 버릴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증언 등을 통해 희생자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프로젝트. 2013년까지 400여만 명의 이름이 기록됐다.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 중이다(좌) 크라쿠프로 돌아가는 아우슈비츠 앞 버스 정류장.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흔적을 남겨두었다. 역사를 통해 인간을 진보하고 있는 걸까.
쿠라쿠프는 아우슈비츠로 가기 위한 관문 도시다. 현재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다. 많은 이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지기 위해 이 도시로 들어왔다. 유대인에게 유화적이었던 폴란드, 특히 크라쿠프는 그 때문에 누구보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 되었다.
올드타운에서 길을 건너가면 유대인 지구인 ‘카지미에슈(Kazimierz)’가 있다. 올드타운과 달리 낡은 느낌의 건물이 스산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그나마 군데군데 자리한 공방과 벽화가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강을 건너가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쉰들러 공장’이 나온다. 유대인들은 가진 것을 빼앗기고 이곳 ‘게토’로 내몰렸다.
쉰들러 공장을 향해 다리를 건너가면 트램 정류장이 나온다. 그 옆 광장엔 한 방향을 바라보고 쭉 늘어선 의자가 있다. 지나가는 이들의 쉼을 위해 놓은 벤치라기엔 영 어색하다. 의자들은 모두 크라쿠프 중앙역을 향해 있다고 한다. 오래전 유대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모여 앉았다. 기다림 끝에 중앙역으로 보내진 이들은 그곳에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나치가 명단을 작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냈기에...)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의자를 들고 나와 대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동력’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나치 앞에 한 사람의 이력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삶은 철저히 모욕당했다. 그저 육체노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군수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지 만이 ‘쓸모’를 가름하는 기준이었다. 유대인들은 나치에게 자신의 육체를, 삶과 영혼을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억될 이름을 빼앗겼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3년 독일 바이에른주 다하우 수용소를 찾았고, 2년 뒤 수용소 해방 7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기념사에서 메르켈 총리는 "(많은 이들이) 나치와 생각이나 신념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히고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며 "우리는 희생자들을 위해, 또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 이를 기억하겠다"라고 말했다.
베를린을 걸으며 문득문득 홀로코스트를 떠올렸다. 거리를 걷다 길바닥에서 손바닥만 한 금속판을 발견할 때면 읽을 수 없는 글자들 중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누군가의 삶을 잠시 생각해보았다. 베를린 거리 곳곳엔 ‘슈톨퍼슈타인(걸림돌)’이란 이름의 작은 조각이 박혀있다. 이 조각이 발에 걸릴 때마다 과거를 되새기며 나치에 삶을 빼앗긴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을 기리자는 의미에서 제작됐다. 조각가 군터 뎀니히는 여기에 희생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추방 날짜 그리고 어디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등을 조각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곳 인근에 설치했다.
독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한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있었다. 베를린의 상징과도 같아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곳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공간을 만들었다.
높낮이를 달리 한 진회색 정육면체 조각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관 같기도 하고 감옥의 창살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조각들 사이를 거닐었다. 아무런 글귀도 없었다. 희생당한 사람의 이름도, 나치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이 공간을 거니는 것만으로 과거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무한도전에 나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군함도’가 생각났다. 군함도는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일본은 이를 통해 당시 첨단 기술이었을 철강, 조선, 석탄 시설을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발전 이면의 어두운 면은 감추기 급급하다. 1940년대 이곳에 끌려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쉬지도 못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스러져간 조선인에 대한 사죄와 추모의 글,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독일 사람들의 속내까진 알 수 없다. 슈톨퍼슈타인이 눈에 띌 때마다 사진을 찍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구태여 찾아가는 것은 여행자의 일이지 이곳에 사는 이들의 일이 아니다. 독일인들은 사진을 찍겠다고 길을 걷다 갑자기 멈춰버린 나를 피해 갈 길을 가기 바빴다. 그들에겐 매일 지나가는 길에 불과할 테니까. 일상 속에서 매번 불편함을 느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주변에 이런 공간이 있어, 가끔 나 같은 관광객을 보면서라도 역사를 한 번씩 되새김질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들이 필요한 것 같다.
-쉰들러 리스트 (1993)
-인생은 아름다워 (1997)
-피아니스트 (2002)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2008)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사라의 열쇠 (2010)
-나는 부정한다(2016)